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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오늘 Jan 30. 2022

17화) 줍기의 달인, '나주워'씨와 커지는 스케일

[옥상의 자연인이 사는 법 : 도전! 식량기르기]

이 글은, 완벽한 자연문맹이었던 도시인 '나자립 씨'가 옥상에서 식물(식량)을 길러 자급한 1년의 이야기입니다. 아무 생명체가 살지 않았던 녹색 방수페인트 행성이 80여 종이 넘는 식물과 다양한 생태계가 이루어진 옥상 낙원으로 변신한 놀라운 천지창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주워온 스티로폼 박스에 토종작물을 심고 생태 순환농사로 길렀습니다. 직접 모든 씨앗을 받고 나누었습니다. 그 좌충우돌 재밌는 경험을 나누려 합니다 :)



10째 주 (4.11~17)



줍기의 달인, 나주워 씨

나의 옥상은 모두 주워온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줍기의 달인, '나주워 씨'다. 환경부 보고 있나?


오늘은 흙 해오기가 괜히 힘들고 귀찮아, 부족한 밭 마련을 위해 스티로폼 박스나 준비해보기로 한다. 부지런히 개미처럼 모아 온 스티로폼 박스로 미래의 밭을 구성하여 배치하여 놓고,

전기인두로 빵빵빵! 한 번에 모두 구멍을 다 뚫어주어 준비를 마쳤다. 그때그때 하려면 아주 귀찮은 일인데, 오늘 한 번에 대량으로 해두니 당분간은 편리하겠다. 이제 흙만 채우면 되겠다. 그 후에 나무 받침대 일이 또 남아있지만.


바람이 세게 부니 귀하디 귀한 내 스티로폼 밭이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또 채집을 위해 집에서 룰루랄라 나왔는데, 글쎄 집 앞 골목에 딱 좋은 스티로폼 박스가 떡하니 떨어져 있는 것이다.


* 딱 좋은 스티로폼 박스 = 깊이가 아주 깊고, 표면적이 넓은 것 (= 아주 귀한 것)


깜짝 놀라서 냅다 사냥을 했더니, 글쎄 빵꾸가 뽕뽕뽕 뚫어져있는 것이 어디서 많이 본 솜씨였다. 그것은 글쎄 옥상에서 바람에 날아가 버렸던 내 박스였다. 이 귀하디 귀한 것이 하늘을 날아 이 먼 곳까지 날아왔을 것을 생각하니 웃기고, 또 하필 나한테 다시 발견되어 잡혀 들어가는 것이 또 웃기고, 같은 박스를 보고 새것 또 구했다고 좋다고 설레어한 것이 또 웃겼다. 너와 나는 운명인 듯싶었다. 다시 찾아온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 후로는 무거운 돌들을 주워와서 모든 빈 박스에 고정!

오늘의 나주워씨는 집을 나가기가 무섭게 또 그뤠잇 통을 발견하였다. 


무를 심기 위해서는 아주 깊은 통이 필요해서 고민이었는데 (아무리 깊은 스티로폼 박스도 그 깊이는 안 나오니까), 무언가 필요한 것이 생기면 내 눈앞에 자꾸 누군가 그것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아주 깊은 통이 버려져있었다.

진품명품 감정 - 주워올 만한 가치가 있는지 요리조리 살펴본다. '통의 기능을 상실했다'라고 사망 판정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아주 큰 바닥 구멍이 나 있는 것이 최대 난점이었다.


하지만, 명의 나주워 씨는 2초 생각한 결과 이 환자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집으로 모셔온다.


청소차에 실려 분해 기약 없는 어딘가 멀리 은폐된 (그래 봤자 인천이지만) 쓰레기 산에 매장될 운명이었던 이 통은 운명적으로 나와 만남으로서 새 생명을 얻었다. 그것도 '토종씨앗 - 게걸무'라는 예쁜 생명을 키워낼 참으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역할을 해낼 사명을 띠고 말이다.

남은 바닥면이 작지만, 아주 단단한 재질이었기에 바스러질 염려는 없어 보인다. 나에게 남고 남는 것은 무엇? 바로 스티로폼 박스의 뚜껑이지! 적당한 두께의 스티로폼 박스를 골라내어 맞게 잘라서 그 안에 꼭 끼워 넣을 것이다. 


대충 잘라본다.

앗! 너무 대충 안정적으로 잘랐더니, 기대했던 '빡빡하게 딱 들어맞음'은 사라지고, 사이즈가 작아 훌렁 들어가 버린다. 어쩔 수 없다. 다시 자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귀찮은 것은 싫어한다.


물 잘 빠지고 좋겠네 뭐. 하고, 물 빠질 구멍을 추가로 뽕뽕이 뚫어주어 완성! 


이렇게 간단히 받침이 재생되어 통의 기능이 살아났다. 화분 완성!

이렇게 무 화분을 만들어내고 뿌듯함에 다시 집을 나섰는데, 앗! 또 누가 돌들과 미니 도자기 화분을 내어 놓은 것이다. 또 주워온다. 


짜잔! 예전에 산에서 주워왔던 바구니와 오늘 주운 도자기 화분은 허브의 밭으로 딱이다. 암면블럭에 뿌렸던 씨앗들이 통 소식이 없어, 오늘 밭을 마련한 김에 흙 완성하고 씨들을 그냥 위에 뿌려주었다. 이로써 라벤더, 로즈마리 밭 완성!


이래서 결국 집을 못 나가는 것이다. 나가면 계속 주워올 것이 생긴다. 아무쪼록 덕분에 필요한 것들이 착착 마련되어간다.

그 다음 날.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가나 했더니, 역시나 또 집 밖으로 나온 나주워 씨 눈앞에 화분 받힘 세트가 똬. 이렇게 필요한 것이 계속 주어진다.

바로 가져와서 놓아준다. 쪽파 밭 받침 완성! 그리고 무 밭도 완성! 이건 사이즈가 너무 맞아떨어져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어찌 이렇게 완벽할 수가!

또 주워왔다. 


단지 햄버거를 먹으러 갔을 뿐인데, 누가, 왜, 내 발길에 이것들을 놓아두는가!

그리고.. 또 주워왔다.


누군가 화분으로 썼던 것이 분명한 구멍 뚫린 뚝배기와 돌 들! 이렇게 주워오기는 끝이 없다.

낮에 주워온 뚝배기는 바구니 화분의 받침으로! 아주 딱이야.




점차 커지는 스케일과 빗물 수집

그렇다. 이제 흙 몇 리터 짜리로는 안 되는 것이다. 처음엔 18리터, 그다음엔 40리터를 샀는데, 이제 50리터를 시키기에 이르렀다.


무조건 화학성분이 첨가되지 않은 '유기농' 흙으로 잘 골라야 한다. '배양토'와 '상토' 표기를 무슨 차이로 하는 것인지도 헷갈려서 한참 찾아보았는데,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하는 말마다 다 다르고, 대충 이해하기로는 그냥 파는 사람이 멋대로 붙이는 단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냥 다 필요 없이 '구성 성분' 표만을 보고 비교하면서 선택했다. 대충 코코피트 + 여러 가지가 다 적절하게 섞여있는데 비율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상토나 배양토나 판매되고 있는 흙들의 구성은 거의 같았다. 화학성분(보존제 같은 요상한 것들)과 화학비료가 들어있지 않은지만 살피고 선택하였다.

아. 그리고 결국 이것까지 구비하게 되었으니!


다이소 3000원짜리 자동 물뿌리개가 며칠도 안 쓰고 바로 고장 나버린 후, 물뿌리개만큼은 고성능, 고용량, 튼실한 믿을 수 있는 제품을 써야겠다 생각하여, 흙과 함께 유일하게 자본을 투여하여 구입한 물뿌리개. 마로렉스. (우리 집 강아지보다 월등히 큰 존재이다.)


옥상에 수도가 없어 계속 물을 통으로 길어 올려야 하기에, 최대 고용량 12리터짜리로! 아직 새싹들이라 물을 연하게 뿌릴 수 있어야 하기도 했다. 물 뿌리개도 브랜드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평생 쓰기로 하며 큰 돈을 썼다. 

밀려오는 먹구름. 말 그대로 밀려오고 있다.


하하. 하지만 나에겐 든든한 빗물 집수 장치가 있지!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비야 오거라! 옥탑 천장면아주 좋은 빗물 수집장치가 되어준다. 받혀둔 페인트 빠레트는 아직 무척이나 쪼매하지만, 곧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야지. 




토종 게걸무, 드디어 밭으로!

귀여운 게걸무 새싹이들. 자줏빛과 녹색의 조화를 벌써부터 안고 있다. 걱정하던 무 밭을 든든하게 마련해 주었으니, 오늘 드디어 방 배정. 흙을 가득 채우고, 암면배지를 조심스레 분해하여 흙 밭에 심어준다.

이쯤 되니, 암면배지는 이제 굳이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물 부은 거즈에 싹만 틔워서 옮겨 심어도 되겠다는 깨달음.

이제 막 씨앗 껍질을 깨고, 뿌리를 내밀고 있는 막내 게걸무의 모습. 씨앗 껍질을 모자로 쓰고 있는 귀여운 모습이다. 조심조심 암면배지를 걷어내고 심어주기.

무 5개가 자라기엔 비좁고 좁은 면적이지만, 그래도 현재로서는 최선이니 어쩔 수 없다. 최대한 간격을 넓혀 오방형으로 정렬 배치! (막내 싹은 너무 작아 보이지도 않는다.) 


이렇게 밭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가장 기쁘다. 드디어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휴~ 무럭무럭 잘 자라라. 무들아. 

식물은 발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 집 식물이 들은 마구 옮겨 다닌다. 구석에 난 아이들은 바로바로 캐내어 적당 간격으로 재배치를 해준다.


식물을 옮기면 무척 힘들어한다고 하지만, 사람도 아주 어릴 때 이민 가면 잘 적응하는 것처럼, 아직 뭘 모를 때 재빨리 뿌리째 조심히 옮겨주면 별 탈 없이 금세 적응하는 듯하다. 우리 집 식물들은 택지 부족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이리저리 많이 옮겨 다녀야만 할 팔자이기에, 강하게 커야 한다. 주인 닮아서 잦은 이사에도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정신력으로 무장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아직 꽃은 하나도 없는데, 요 쪼매난 잎들이 나고 있다고, 벌들이 놀러 오기 시작한다. 나의 줍기 신공을 축하해 주러 오늘도 왕벌이 한 마리가 왔다.


'생태계 파괴로 벌들이 사라져 가면서 파리들이 많아지고, 꽃들이 벌들의 역할(수분)을 파리들에게서 어쩔 수 없이 기대하면서 점차 파리를 불러들이는 형태로 향과 색등을 진화해가고 있다'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나의 옥상 낙원에도 파리들이 벌보다 많이 보인다.


파리 건, 벌이건, 새이건.. 이 동네의 야생 친구들이 '저 여자가 언제부턴가 여기 왔다 갔다 할수록 조금씩 흙과 녹색의 식물들이 생겨나고 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나와 옥상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유일하게 나의 행태를 각별한 관심으로 시청하고 있는 애청자들이다.

아직 먹을 수 있는 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오늘 유독 너무나 사무치게 녹색 풀들이 먹고 싶어서 아직 어린놈들을 어쩔 수 없이 뽑아왔다. 미안하게 되었다.

방금 흙에서 뽑아, 뿌리째 먹는 살아있고 싱싱한 자연.


무에서 유가 창조된 이 놀라움에 경탄하고, 햇살과 바람, 흙의 기운에 감사하며. 살아있는 에너지를 먹고 그만큼 잘 쓰는 내가 되자! 하며 맛있게 먹는다.


아주 작지만, 꿈꿔왔던 삶으로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어.


(다음 편에 계속)



* 이 시리즈 전체 보기 : https://brunch.co.kr/magazine/natoda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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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한걸음 Daily Project] 소개 & 참여 : https://blog.naver.com/cocolikesun/222636226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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