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완벽한 자연문맹이었던 도시인 '나자립 씨'가 옥상에서 식물(식량)을 길러 자급한 1년의 이야기입니다. 아무 생명체가 살지 않았던 녹색 방수페인트 행성이 80여 종이 넘는 식물과 다양한 생태계가 이루어진 옥상 낙원으로 변신한 놀라운 천지창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주워온 스티로폼 박스에 토종작물을 심고 생태 순환농사로 길렀습니다. 직접 모든 씨앗을 받고 나누었습니다. 그 좌충우돌 재밌는 경험을 나누려 합니다 :)
농부의 모자.
어렸을 적,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디젤 청바지 사고 수박 한 통을 사은품으로 받아오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신용카드 남발로 무장하여 물건은 무엇이든 백화점에서 사는 것이며, 화장하지 않으면 절대 나갈 수 없는 것이며, 강남역에서 새벽까지 이 애들 저 애들과 의미 없는 이야기들로 흥청거리면서 놀아 재끼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옥상의 자연인'이 되었다.
그때 백화점에서 '어디 휴양지에나 가서 써야지' 하고 사두었던 밀짚모자. 이제는 맨손 맨발 화장 없는 얼굴에 고요함을 안고 농부 모자로 쓴다. 이 모자를 쓰던 순간,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매일 같이 이 농부 모자를 쓰고 옥상으로 출근한다. 전장에 나서는 용사의 무기처럼, 이것을 쓰는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든든해진다. "나는, 농부다!"
누가 식물은 발이 없다 했는가! 오늘은 또다시 우리 식물 보육원 어린이들을 한 바가지 이사를 시켜줄 것이다.
식물 팔자도 주인 팔자와 닮아서, 우리 밭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뿌리 뽑혀 이동하기에 바쁘다. 미안하다. 어쩔 수가 없다.
점점 상추 주인의 몸집이 커져감에 따라 세입자인 임시 거주민 비타민이 들은 또 다른 곳으로 쫓겨 이사를 가야 한다.
뿌리째 뽑혀서 또 새로운 임시 거주지로 이사했다. 이제 콩들 밭의 남는 여분 땅으로 이주한다. 이것이 벌써 몇 번째 이사인지 모르겠다. 등본의 줄이 벌써 많아지고 있다.
계속 이 집 저 집으로 세를 살며 뿌리 뽑혀 이동되는 불쌍한 비타민 난민들.
하도 식물들을 이리저리 옮기다 보니, 나 또한 '식물 이사'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다. 뿌리 손상 없이 잘 퍼내고 땅을 훅 파서 싹 넣고 슉 덮어주는 감쪽같은 이사를 점점 더 재빨리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맞물려, 이사 간 아이들도 곧잘 적응해내는 것이다.
비타민 세입자들은 이제 감자 밭까지 진출하였다.
양배추 꽃 밭도 점령.
양배추 조각의 꽃은 점점 더 꽃의 모양을 피워내고 있다. 과연 어떤 모습이 될지 흥미진진하다. 힘내라!
역시나, 많은 인구수로 인해 뿌리째 뽑혀 또 이동하는 무들. 어머나~ 그새 조금 커서 뿌리가 튼실해져 가고 있다. 이 작은 뿌리가 훗날 그 커다란 무로 성장하는 것이로구나!
땅콩 밭의 넓은 부지로 옮겨져 빼곡히 자리 잡은 무 세입자들. 흙 깊이가 깊은 화분이 귀하니, 콩들은 이제 무들과 어쩔 수 없는 합방을 해야 한다. 강하게 자라거라.
이렇게 점차 풍족해져 가는 나의 옥상정원.
어린이들아. 이리저리 뿌리 뽑혀 정신없이 옮겨 다니는 고난이 있긴 하지만, 주인만큼 온갖 시련을 어떻게든 잘 이겨낼 거라 믿어본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농부의 모자를 쓰고, 오늘 기념적으로 큰 잎들 첫 수확을 해본다. 청경채의 첫 큰 잎 따고, 토종 상추도 첫 수확.
양상추의 아직은 작지만 제일 큰 잎. 한번 먹어볼게!
오늘도 자연이 음식을 하사해 주셨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바로 딴 잎들을 물에 살짝만 헹군 후, 올리브 오일 + 감귤 식초!
아무것도 치지 않고 고유의 잎 맛을 먼저 눈을 감고 가만히 먹어 음미하는 것이 예의인 듯싶다. 생으로 먹을 때가 많은데, 가끔은 이렇게 살짝 감귤 식초의 달고 신맛을 추가해도 좋다. 무척 아름답다.
실내에서 새싹채소로 길러보고 있는 비타민들도 확인해본다. 이제 제법 완전 녹색이 되어 푸르른 에너지 가득! 보기만 해도 어린이의 기운을 전달받는 느낌이다. 아래를 보니! 면포를 뚫고 강인한 의지로 뿌리를 길고 길게 수염처럼 내린 모습들이 보인다.
며칠 후, 비타민 새싹이 들이 벌써 빼곡하게 숲을 이루었다.
투명 통이다 보니 햇살을 많이 받아 키를 무리해서 크게 키울 필요가 없는지 적당히 그들 안에서 경쟁하는 정도로만 자랐다. 요놈들은 베란다에 두고 그때그때 하나씩 가장 크게 자란 것부터 뽑아 먹고 있다. 그래도 다음 날이 되면 또다시 가득이다. 요술 바구니가 따로 없다.
농사일 마치고, 밥 먹고, 휴식을 위해 잠시(라기엔 투 머치 시간) 유튜브를 켰다가, 박막례 어르신 채널에서 '쑥버무리' 편을 보게 되었다.
그 영상에서 나오는 경험담에서 쉽게 넘어갈 수 없는 큰 Insight를 얻었는데, 바로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는 '먹거리의 풍요'는 겨우 1세대도 넘지 않은 몇십 년 사이의 잠깐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우연찮게 지금 우리는 '딱 그 시기'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어디든 먹거리가 널려서 의미 없는 먹방, 욕망 표출, 쓰레기 등으로 생명을 소비해버리는 그 잠깐의 불운의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전체 인류 역사, 지구의 역사에서 '굶주림'을 겪거나 상상해보지 못하는, 그래서 식량과 생명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겨우 지금의 이 세대뿐인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당연해 보이는 이 먹거리의 풍요는 절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아주아주 일시적인 풍전등화의 상태로 바라보고 있다.
유전자 조작 GMO 식물 생산, 대규모 단일화 단작, 토종씨앗의 말살, 그로 인한 종 다양성의 파괴.. (겨우 몇십 년 사이 토종종자의 95%가 사라졌다)는 여러 가지 변화(기후, 그로 인한 변이 병충해, 바이러스 등 타 종들과의 먹이 싸움)에서 절대 승률이 높은 게임이 될 수가 없다.
곧 머지않아 '식량난'이 인류를 위협하는 최대 변수로 부상할 것이다. 그래서 우린 스스로 자신의 먹거리를 길러낼 수 있는 자급 능력을 늘리고, 종 다양성을 늘리고 보존해나가는 실천, 굶주림(풍작과 흉작의 때가 번갈아 오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다)에 대한 대비, 채집과 자연적 보존 방법에의 지식과 기술 함양, 무엇보다 '소식(적게 먹기,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불필요한 생명 낭비 줄이는 음식에 대한 예의)'을 하여 적응력을 높이고, 타 생명체들과의 균형 있는 공생을 의식하고 노력해야 한다.
* 박막례 할머니 <쑥버무리 편> : https://youtu.be/tcTzyK2DJt4
단순히 "웃기다, 맛있겠다." 하고만 끝날 수 있는 박막례 어르신 요리 채널이었지만, 그 안에 생생히 담겨있는 겨우 몇십 년 전의 '당연한 굶주림'의 경험담은 나에게 더욱 진하게 이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식물을 키우고 관찰함으로써 참으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닫고, 생각해 보게 되고 있다.
난 올해 한 해, '어떤 학교'에 들어왔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자연학교'라 할 수도 있겠고, '생명학교, 생존 학교'라 할 수도 있겠다. 가르치는 선생님은 자연이다. 올해 이 학교에서 삶의 발판으로서 가장 중요한 기초들을 분명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매일매일이 무척이나 새롭고 즐겁다.
내일 선생님은 또 무엇을 가르쳐 주실까! 설렘으로 이번 주 농사 기록은 마무리 :)
(다음 편에 계속)
* 이 시리즈 전체 보기 : https://brunch.co.kr/magazine/natoday1
*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는, 이 작가의 비법이 궁금하다면?
[하루한걸음 Daily Project] 소개 & 참여 : https://blog.naver.com/cocolikesun/222636226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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