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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오드 Mar 12. 2021

글쓰기에 대하여 (마거릿 애트우드 저)

-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여섯 번의 강의

"대부분의 사람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 본인 머릿속에 책이 한 권 들어 있다고, 시간만 있으면 글로 풀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든 글쓰는 이의 자아상에 대해, 이만큼 예리한 통찰이 또 있을까? 




이 책의 저자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캐나다 출신의 소설가이며, 시인, 에세이스트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는 작가이다. 그녀가 부커상을 두 차례를 수상한 것만 봐도, 그만큼 문제적이며 시의성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그동안 수 차례에 걸쳐 글쓰기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았고, 이 책은 그간의 강의 내용들을 6개의 단락으로 묶어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선 그녀의 작품을, 혹은 글쓰는 스킬에 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다.

이 책은 마치 작가 Writer 라는 (개념) 것을 가운데 놓고 그 주위를 계속해 돌면서 그것이 대체 무엇이고, 왜 존재하는지를 탐색하며 알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본문에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등장하고, 다채롭게 인용된다. 이는 내가 가지고 있던 책과 작가,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개념을 확장하려는 시도처럼 다가왔다. 


문자를 쓰고 읽을 줄 아는 이는 흰 여백에 연필만 주어지면 무엇이든 적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쓴다하면 다 작가라고 볼 수 있을까? 


1장

<"물론 작가가 되는 것과 쓰는 것 자체는 (...) 구분할 필요가 있겠지요."

"아, 거 봐요!" 니키가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겁니다. 아무리 글을 써도 만약 작가가 될 수 없다면, 딱히 써야 할 필요도 없어요!" p31,32> 


분명 '쓰는 것'과 '작가가 되는 것'은 구별된다. 그렇다면 이토록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도 사람들은 왜 그토록 자기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 걸까? (독립출판이 하나의 출판 트렌드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동기에 대한 것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에 걸맞는 세가지 질문이 서론에 등장한다.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왜 글을 쓰는가?

-글은 어디에서 오는가?


저자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왜 작가가 되었는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과정이 (신기하게도)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경험한 것과 흡사했다. 어쩌면 작가가 되겠다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어떻게 작가가 된 걸까요? 작가는 사람들이 변호사나 치과의사가 되겠다고 선택하는 것처럼 내가 택한 일도, 내가 택할 법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1956년, 축구장을 가로질러 하교하던 중에 그냥 갑자기 그렇게 된 거였어요. 머릿속으로 시를 쓴 뒤 종이에 옮겨 적었는데 그때부터 오로지 글을 쓰고 싶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안 났어요. 내가 쓴 시가 훌륭한지 어떤지도 몰랐지요. 하지만 알았대도 아마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경험이었으니까요. p43> 


내가 쓴 시가 등단이 되어서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심상을 글로 옮겼을 뿐이고 이것을 계속 해 나가겠다고 결정했기에 그녀는 작가가 되었다.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러한 경험이었다.  


<작가는 그러니까 신문 기사를 쓰거나 판에 박힌 소설을 찍어내는 달인이 아닌 예술가가 되기를 열망하는 작가는, 정말 특별한 사람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걸까요? p60> 


2장

여기에 대한 답을 두번째 장에서 찾는다.


그러한 인식의 저변에는 작가가 가진 이중성이 크게 작용한다.

<우리가 '작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버리는 두 개의 독립체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개별적인 작가 말입니다. 여기서 두 독립체라는 건, 글을 쓰고 있지 않을 때의 존재,(중략)...

아무도 안 볼 때 그 몸을 넘겨받아 글쓰기에 사용하는, 같은 육체를 공유하지만 좀 더 희미하고 애매모호한 또 다른 존재를 의미합니다. p68,69> 


저자는 일상의 존재와 글쓰는 존재의 두 가지가 독립되어 한 작가에게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 책의 세계는 픽션이며, 간접적인 경험과 상상력이 더해져 구현된 세계이다. 우리가 모두 경험한 것만 글로 써야한다면, 에세이, 르포르타주, 자전적인 전기소설 밖(논픽션)에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에게는 일상을 벗어난 자유로운 자아(for 글쓰기)가 따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작가가 글을 쓰는 시점과, 독자가 그 글을 읽는 시점은 늘 시간차가 존재한다. 그러한 연유로 작가는 부득이하게 이중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도 덧붙인다.

<모든 작가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방금 전에 읽었던 그 책의 작가를 절대 실제로 만날 수 없으니까요. 글을 쓰고 출간을 하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출간할 때가 되면 책을 썼던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고 없지요. 또는 그렇다고 알리바이를 둘러댑니다. p71> 


3장

좀 더 현실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아무리 유명하고, 많이 팔리는 작가라도, 그래서 얼마나 버는가?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등장하는 돈과 예술에 관한 것이다.


<이번엔 예술과 돈이라는 양 갈래에 대해 알아볼 차례입니다. 영어식 표현으로는 도로가 바퀴와 부딪치는 지점, 그러니까 작가가 예술적 기교라는 돌바닥과 월세라는 단단한 바퀴 사이에 꽉 끼게 되는 지점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작가는 돈을 위해 글을 써야 할까요? 돈이 아니면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 할까요? 어떤 의도나 동기가 있어야 적합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p102>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명성일까? 부일까? 둘 다면 더 좋겠지만, 실제로 우리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책도 많이 팔리고, 부도 많이 쌓을 수 있기를 소망할 것이다.  


<작가에게 이런 돈 문제는 선택입니다. 오직 선택의 문제일 뿐이에요 p104> 


<글을 쓰고 이문을 남기는 사람이 

살아남아 다른 날 또 글을 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을 것" 이라는 금기아닌 금기가 존재한다. 우리는 왜 작가가 '부'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공고하게 만들어지 신화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가난하면서 진실한 예술가, 또는 부유하면서 영혼을 팔아넘기 예술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하거든요. 이렇게 신화가 굳어져가는 거지요. p109> 


저자가 파리에서 만난 한 지식인의 질문 (당신이 베스트셀러를 쓴다는 게 사실인가요?)에 답한 답을 하면서도 느꼈던 모멸감(혹은 당혹감일 것이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일부러 쓰는 건 아니에요." 


<문학적 가치와 돈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돈이 되는 좋은 책, 돈이 되는 나쁜 책, 돈이 안 되는 좋은 책, 돈이 안 되는 나쁜 책. 조합은 이렇게 네 가지뿐입니다. p111> 


4장

다음 4장에 이어지는 내용은 작가가 마주하게 되는 '도덕 및 사회적 책임'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이 예술 활동을 통제하며 예술가에게 간섭하는 지점은 '돈과 힘'이라고, 예술가가 예술 활동으로 사람들에게 간섭하는 지점은 '도덕 및 사회적 책임'이라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질문은 아주 짧게 압축 할 수 있습니다. 시장에 영혼을 팔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얼마에 팔았고, 누가 샀는가? 영혼을 팔지 않았다면 누가 예술가를 껍질 무른 게처럼 짓밝는가? 영혼을 판 대가로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p152> 


그렇다면 작가는 글을 쓸 때 도덕적 판단이 없는 중립적인 글을 써야할까? 

<도덕적 함의가 전혀 없는 글을 쓰는 게 가능할까요? "아뇨." 

"도덕적 함의가 담기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나와야 하고, 그 결과물의 옳고 그름에 대해선 독자가 판단할 거예요. 작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말이에요." p163> 


<등장인물이나 결과에 대한 가치 판단은 작가가 하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공개적으로 해선 안 되지요. (중략) 하지만 독자들은 작품 속 인물을 해석하고, 고로 판단합니다. p163> 


<언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아요. p164> 


조지 오웰은 글쓰기 자체가 정치와는 무관할 수 없는 활동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작가는 글 속에서 가치 판단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소설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김지영씨의 삶을 보여주며, 그와 함께 1960-2016년까지의 통계자료가 각주로 달린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책은 향후 2년간 스테디셀러가 되면서 많은 독자가 읽으며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소설이 되었고, 평론가들로부터는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평을 받는다.  


<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걸 정하는 건 작가가 아니라 독자예요. p177> 


5장

5장은 독자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독자와 관련한 세가지 질문이 등장한다.  


- 작가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책의 기능, 그러니까 의무는 무엇인가?

-독자가 책을 읽고 있을 때, 작가는 어디에 있는가?


<대상이 없는데 글을 쓰는 소설가는 드뭅니다. 보통은 가상의 일기를 쓴느 소설가들조차 독자를 상정하지요. p184> 


<작가들의 공통적인 딜레마는 지금이든 나중이든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읽을까 하는 것입니다. p185> 


<독자가 작가와 시공간상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든 상관없이, 오직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닙니다." 

"시는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에요." (영화 <일 포스티노> 중에서) > 


작가가 글을 쓰는데 꼭 필요한 것은 도구적으로는 언어(문자)이며, 최종적으로는 독자이다. 작품을 읽고 해석하며, 사유하는 독자로 인해 작가의 작품은 완성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 역시 글을 쓰고자 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쓰여졌고, 저자가 보낸 메세지는 나를 통해서 재해석된다. 저자가 6강의 강좌를 정리했지만, 나에게는 유의미한 하나의 강의만 남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작가와 독자는 별도로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지만 책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의 가상의 유기체와 다름 없다는 생각도 든다. 


6장

마지막 6장은 다소, 은유적이다.


다루고 있는 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고, 그에 대한 서사시와 소설 작품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어둠 속 지하세상, 죽음이 아니라 이야기가 존재하는 곳. 고로 '이야기 story'는 어떻게 탄생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읽혔다. 


<이번 장의 제목은 "죽은 자와 협상하기"로, 모든 서술적 글쓰기, 아니 어쩌면 모든 글쓰기는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매혹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가설을 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사후세계로 들어가, 죽은 자로부터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데려오고자 하는 욕망에서 글쓰기가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거죠. p220> 


<이야기가 있는 곳? 이야기는 암흑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감이 떠오르는 것을 섬광에 비유하는 것이지요. 내러티브 속으로, 내러티브의 과정 속으로 들어가는 건 어두운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어요. 시인들도 이 사실을 압니다. 역시나 컴컴한 길을 지나가니까요. 영감의 우물은 저 아래로 이어지는 굴입니다. p244> 


책 속에 인용된 소설들은 내가 읽었던 것보다 그렇지 않은 작품이 더 많았다. 풍부한 인용은 각주 페이지가 252쪽에서 265쪽까지 정리된 걸로만 봐도 얼마나한 양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자기 글을 쓰고 싶어하는 지금, 이 책이 매력적인 글쓰기, 스티븐 킹이 쓴 <유혹하는 글쓰기>처럼 실제적인 예시와 가이드를 전하진 않지만, 왜 글을 쓰고자 하는 걸까? 하는 내면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어떤 지점에서 글쓰기가 시작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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