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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오드 Jul 08. 2021

일상이 고고학

스토리텔링의 천재인 저자랑 나도 모르게 따라나서게 되는 역덕의 세계

# 들어가며


천문학자에게는 세상이 별의 주기와 운동으로 읽힐 것이고, 코딩전문가는 컴퓨터 화면 하나도 프로그래밍 언어로 읽힐 것이고, 건축가에게는 도시를 채우고 있는 다양한 건축물들에 대한 것들이, 소설가에게는 세상의 일들이 활자화 되어 머릿속에서 재구성될 것이다. 그렇다면 고고학자는 어떨까? (고고학이라는 단어가 멀게 느껴진다면) 역사가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나누는 대화라고 에드워드 카는 말했다.


에드워드 카가 말한 것을 해석해보자면 역사는 박물관 속에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살아 숨 쉬는 현재진형행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실에 간다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석촌호수와 롯데타워가 되겠지만, 사실은 그곳은 석촌동 고분군이 있는 굉장히 역사적인 장소다.

도심 속의 그만한 고분군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에서 역사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이러한 사실을 친절히 알려주는 이가 바로 이 책의 저자 황윤작가이다.


홀로 박물관과 유적지를 찾아 감상하고, 이 유적지가 어디에서 어떻게 중요한 것이지 고증하며 공부해나가는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일을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삼국시대 중 하나이지만 결국에는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지 못했던 백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백제라는 나라가 가졌던 위상, 그들이 택했던 외교법, 고매한 예술 감각과 건축기술. 그러나 역사 속 주역이 되지 못했기에 (삼국통일은 나당 연합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흔적을 찾아내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유시민 작가가 쓴 <유럽도시기행1>의 첫 도시인 그리스가 떠오른다.

고대 도시국가를 이루었던 화려한 과거와 지중해 문명은 온데 간데 없이 사방이 보수공사가 이루어지는 역사 속 현장이 우릴 반기는 그리스에서는 그만한 상상력을 갖고 바라보아야 제대로 도시가 품고있는 컨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고 했다.


황윤 저자가 전해주는 백제의 사정도 비슷했다.


풍납토성에 오면 상상력으로 주변을 살펴보는 눈이 필요하다. p23


지금의 기준이 아닌 과거의 기준으로 이곳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풍납토성은 한반도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규모의 토성 유적이다. 즉 흙으로 만든 성으로 최대 규모라는 의미다. 이는 당대 한반도 내 가장 큰 도시였던 평양과 비교해도 거의 비슷한 크기였다. p24


박물관의 도움을 받아 머리 안에 백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덕분에 이제는 유적지의 주축돌 모습만 보아도 그 위에 지어졌을 건축물이 얼추 그려진다. 박물관을 다니면 이처럼 상상력도 발전된다. p174



# 책 속으로,


1)

지금의 한반도 정세와 가장 비슷한 역할을 했던 역사 속 나라는 어디일까?


바로, 백제다. 


 한반도 국가의 뿌리 중 하나인 부여에서 시작됨을 자랑으로 여겼던 나라, 한반도 중심에 위치한 한강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알려준 나라, 선진국으로부터 문화를 받아 주변국으로 연결하는 중개 시스템의 중요성을 보여준 나라 등 한국에 남겨진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어쩌다보니 지금의 대한민국도 백제의 모습을 많이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p216 


 마찬가지로 백제는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되 경험이 쌓이면서 백제 스타일로 이것을 흡수, 정리하였다. 그 결과 일본 등지에 큰 영향을 미친 고급 문화를 만든 것이다. 이 역시 문화 교류란 단순히 받아들인 것을 넘어 내 것으로 해석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한 일이자, 그렇게 결합되어 탄생한 문화는 남다른 경쟁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p46 


2)

서울에도 고분군이 있네


책의 시작은 부여와 공주가 아닌 서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 잠시 읽어보려다가 놓지 못하고 끝까지 읽어 나갔다. 책의 초입부터 의외성으로 독자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울 생활권이 아닌 나 같은 독자에게 잠실에서 백제의, 정확히 말하자면 한성백제의 유적지를 만난다는 것이 신선함 그 자체였다.


석촌동의 290기중 8기만 남은 고분군 중에 특히 3호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넓은 면적과 원래의 형태를 바탕으로 근초고왕의 능으로 추정만 할 뿐인데, 석촌동 고분군 3호와 비교대상에 두는 장군총과의 차이를 통해 두 나라(백제와 고구려)가 추구했던 미감과 문화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알 수 있다. 궁금증을 한껏 이끌어낸 저자는 석촌 호수를 방문하면 의외의 분위기에 더 흡족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이 저자의 스토리텔링의 정수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곳을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한다는 점이다.


3)

백제를 대표하는 유적지와 유물


▶ 대통사

대통사는 백제를 넘어 한국 사찰 역사에서도 의미가 매우 크다. 한국 최초의 사찰은 375년에 지어진 고구려의 초문사이지만 위치를 알 수 없으며, 역시 한성백제 시대에도 385년 사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이름과 위치를 알 수 없다. 반면 대통사는 삼국 시대 사찰 가운데 건립 연대와 장소, 이름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곳 중 가장 오래된 절이니, 사실상 사찰의 시원이라 해도 무방하다. 1탑 1가람 형식은 백제를 넘어, 일본에도 큰 영향을 준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백제금동대향로

이 작품 한 점을 보기 위해서라도 국립부여박물관은 반드시 인생에 한 번은 와야 한다. 바로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유물이 발견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1993년 능산리 고분의 주차장을 만드는 과정 중 절터의 서쪽 한 구덩이에서 백제 유물들이 출토된다. 그래서 더 깊게 조사를 해보니 백제 기왓장이 쏟아져 나온 곳 아래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웅덩이 속 진흙에서 1400년을 있었기에 산소를 접할 수 없었고, 그 덕분에 형체도 거의 그대로인 채 발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백제금동대향로 주변에는 천 조각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천으로 곱게 싸서 급하게 숨겨놓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곳은 대장간으로 밝혀졌기에 숨겨둔 물건이라는 사실이 더욱 확실해졌다. 660년 계백이 김유신에게 전사하고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백제 수도로 쳐들어올 때 사찰의 누군가가 위급 상황 속에서 이 유물을 급히 숨겼고 이후 사찰이 불타면서 지붕의 기와가 쏟아져 내려 무너지며 완벽하게 백제금동대향로는 자신의 위치를 숨길 수 있었다.(드라마가 따로 없다!) 


▶ 정림사지

사리함이 정림사지 5층 석탑 아래에 있다면 그곳에는 거의 50% 가깝게 탑이 만들어질 때와 만든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사리함 중 그런 내용이 없는 것도 있어서...절반 확률. 그런데 놀랍게도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지금껏 단 한번도 해체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 즉 탑이 허물어져서 사라진 후 도굴을 통해 사리함이 없어진 경우나 또는 탑 내부에 있던 사리함을 열어서 도굴해간 경우,  또는 근현대 들어와 조사 과정에서 탑을 해체한 후 내부에 있던 사리함을 꺼내 박물관 등에 보관하는 경우가 아니라 백제 시대부터 있는 그대로 과거 기록을 지닌 채, 서 있는 탑이라는 의미다.


▶ 미륵사지 석탑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 할 만큼 석탑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들 석탑의 조상 중 조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미륵사지 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 이후 돌로 탑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륵사지 석탑 중 지붕돌을 받쳐주는 넓적한 돌들을 가장 관심을 두고 관찰했다. 자세히 보면 목탑이라면 기와가 배치될 지붕 모양의 돌 아래 마치 거꾸로 된 계단처럼 조금씩 면적을 적게 하며 지붕을 받쳐주는 돌이 보인다. 3단 정도 돼 보이는 이 돌 덕분에 안정적으로 지붕을 지탱해주며, 지붕돌이 목탑 지붕만큼 더 뻗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당시 백제 장인들이 돌로 얼마나 목탑 형식을 닮게 만들려고 고민하고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지붕모양의 돌을 받쳐주는 돌은 '층급 받침'이라고 한다.)  


4)

뛰어난 외교술


백제는 고구려에 이대로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이 시점부터 백제는 한반도 세력권 내 지방 세력과 멀리는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자신들이 고급 문물을 전해주는 것을 이유로 적극적인 외교 협력과 병력 지원을 요구하였다. 이로서 중국 도자기와 백제 금동관, 금동신발은 4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백제 여러 지역과 더불어 일본에까지 적극적으로 뿌려지게 된다. 이는 고고학 발전을 통해 숨겨진 보물처럼 출토되면서 당대 백제 문화의 전파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물이 된다. 즉 단순한 고급 문화 후원이 아니라 그 반대 급부를 적극적으로 원하는 외교 수단이었음을 의미한다. p73, 74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지금도 꽤 잘 알려져 있다. 한성백제 시대인 근초고와 시기 일본과의 인연은 칠지도라는 유물로 증명되고 있으며, 그 뒤로도 왕의 동생이나 친족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을 하였다. 칠지도는 일본의 국보이자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한 유물이다. 금상감으로 당대의 글이 새겨져 있으니 특히 의미가 있다. 백제는 이처럼 뛰어난 철기 기술과 문자 기술을 자랑하며 일본에 외교적 힘을 보여준 것이다. 이후 성왕 때 이르러 백제는 이번에는 또 다른 고급 문화인 불교를 전달해주면서 인적교류를 더 크게 늘린다.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 "근대 이전의 일본은 기술, 과학, 정치의 거의 모든 방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던 중국 문명의 테두리 바깥에서 성장해왔다. 일본이 대륙으로부터 받아들인 것(매우 많이 받아들였다)의 상당 부분은 중국보다 훨씬 작은 나라인 한국이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져 들어왔다. 그것이 일본이 대륙의 제도를 흡수하는 방식을 형성...(중략)" - p44, 45 ) 



# 나오며,


영화 속 주인공보다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조연.

<일상이 고고학>에서 저자가 다녀온 백제를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에 잠겼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와 만주까지 국경선을 넓혔던 고구려 사이에서 늘 세력 견제를 하면서 한강이남 지역을 차지하고 뺏기기를 반복하던 백제.


백제는 어떤 나라였을까? 


다만 신라는 최종적으로 역사의 승리자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 전설을 예쁘게 포장하고 숙성시킬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반대로 백제는 그렇지 못했다. p190


근래 들어 한성백제 및 여러 백제 유적지에 대한 조사, 백제 고분에 대한 조사의 결과물이 속속 등장하면서 이제는 자료가 풍족한 신라만큼 백제 역시 실체적 모습을 충분히 그려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책은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던 백제에 대한 편편한 인상을 좀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3권의 시리즈(고구려 이야기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출간예정으로 짐작..)로 등장한 이 책의 장점은 단연코, 저자 황윤이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단행본이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면밀한 고증과 자료들은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들을 곁에 두고 찾아보며 썼어야 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저자는 모든 수고를 짊어지고 우리에게는, "그럼 걷는 동안 성왕이 이곳 부여로 수도를 옮긴 후의 백제를 이야기해볼까나,"  하면서 편안하게 말을 건낸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는 어려운 이야기야.' 라던가, '앞 뒤 배경 지식도 없는데 내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오롯이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길을 따라 걷는 저자 옆에 선 말없는 동행으로 책을 읽어나갈 수 있게 된다. 독서라는 활동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정수를 이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느꼈다. 



Main image. from facebook @readingcat14 책읽는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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