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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오드 Oct 07. 2022

오늘도 옆 팀의 신입이 ‘추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0년간 무직이었던 나는 겨우 내 몫의 돈을 벌게 되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에서 날 구했다. 나는 이제야 좀 떳떳한 인간이 된 것 같다. 10년간 우물 안에 있던 개구리에게 세상은 퍽이나 흥미롭다. 특히 마트라는 곳의 다양한 인간 군상 속에서 나는 어떤 인간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추노: 推奴, 쫓을 추가 아닌 밀 추다. 노비를 추적한다고 해서 추노가 아니라, 도망간 노비들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의미의 추쇄를 한다고 해서 추노다. 


마트에서 ‘추노’라 하면 하루 일하고 다음 날부터 나오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스스로 지원서 넣고 면접보고 돈 벌러 온 그 사원은 왜 하루 만에 ‘추노’해 버린 걸까.


마트 사원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은 ‘진열’이다. 역시 백화점과 똑같다. 같은 면적 안에서 얼마나 많은 물건을 효과적으로 팔 것인가. 직매 거나 임대매장이거나 많이 팔아야 하는 것은 공통의 목표다.


보통 생각하는 것은 매장 선반에 비어 있는 물건들을 카트에 싣고 와서 꽉 차게 채워 놓으면 끝...?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정말 이 일의 빙산의 일각이었다.


진열 pt라고 뽑았으니, 순수하게 진열만 했으면 추노 하지 않았으리. 진열이란 납작한 직무는 마트에서 전후 확장을 거치며 그 모양새는 흡사 택배 상하차의 업무와 비슷해진다.


*파렛트: 물류센터나 공장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완성된 제품을 차곡차곡 쌓아 놓으면 이후 지게차 혹은 핸드 파렛트로 한 번에 들어 기계나 차량에 실어 목적지로 보내는 용도로 쓰인다.


파렛트 위에는 박스가 빼곡히 쌓여서 후방 창고에 도착한다. 여기에는 MD2팀의 물류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여기서부터 진열 일은 시작된다. 켜켜이 쌓인 박스 안에서 내 박스 찾기. 완구라고 스티커가 붙어 있거나, 박스 겉면에 쓰인 것이 장난감 제조사나 유통사인지를 보고 박스를 구별한다. 그렇게 하루에 수십 개의 박스를 옮긴다. 파렛트에서 엘카트로 옮기고, 매장으로 옮기고, 후방 창고에 선반 진열을 위해 싣고 이동한다.

파렛트 - 엘카트(물건이 없는 카트의 모양이 L자와 같다고 하여 '엘카'라고 부른다 - 엘카트를 끌고 매장으로 나선다

이렇게 엘카트를 끌고 나타난 마트 사원의 모습은 우리가 마트를 방문했을 때 보게 되는 그 진열사원이다.(이미 창고에서 전반전을 마치고 나왔어요 헉헉) 택배 박스 풀 듯이 슥 칼로 그어 제품을 꺼낸다. (본인의 근무 파트인) 완구의 경우 판매 제품의 크기가 크다 보니 한 박스에 많이 들어야 3-4개의 제품이 들었다. 3개의 제품이 선반에 다 들어갈 경우 착착착 넣어주면 되고, 2개가 들어가고 1개가 남으면 선반 제일 윗 칸에 올려둔다. 


이렇게 엘카트에 실린 열댓 개의 박스를 풀고 나면 다시 창고로 돌아가, 다른 엘카트에 실린 물건을 또 끌고 나가서 매장 내 진열을 한다.


완구의 경우에는 박스의 크기가 무게와 비례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게 생수거나, 주류, 음료로 가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2L짜리 6팩들이 생수가 꽉 차게 올라간 파렛트를 떠올려보라. 매번 매장까지 끌고 가서 진열해야 하는 것이 물이라면, 맥주라면, 음료수라면 시즌이 여름이라면! 정말 힘들어진다. 내 셔츠에 땀은 마를 날이 없고, 내 걸음은 멈출 줄 모른다. 계속해서 채워 넣어야 한다.


우리 옆 팀인 MD1팀에는 자사 제품 PB상품만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섹션이 있다. 여기는 그야말로 다루는 품목도 세제, 화장지 등 생필품부터 과자, 음료 가공제품, 냄비, 전기포트 같은 것도 팔고, 기타 일회용품 등 부서를 넘나드는 제품군의 총집합을 이루고 있는 아주 무시무시한 곳이 존재한다.


여기에 들어온 진열 pt는 단 하루 매운맛을 보고는 추노 해버렸다. (일이 끝이 없어요...)


저렴한 가격과 대용량의 제품은 가성비를 앞세우는 노마진격 제품으로 진열하기에 맞춰 불티나게 팔려버리고 또다시 텅텅 빈 매대가 되어 버린다. 미친 듯이 반복적이지만 보람은 없는 이 일 앞에 결국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던 pt는 조용히 추노를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엘카트에 오늘의 물류를 옮기던 나는 지나가던 1팀 여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저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만도 하지, 그럴 만도 해.


다양한 추노 스타일을 보았다. 보통은 오늘 출근하고 다음 날 잠수를 타는 잠수형 추노.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하면서 집으로 가버리는 중도 퇴근형 추노. 휴학생으로 알바를 하러 왔다가 급 복학해야 할 사정이 생긴 복학생 추노 등. 제일 손쉬운 방법은 잠수타기겠지만 이건 서로에게 마이너스다. 그렇게 퇴사할지라도  퇴사서를 써야 하기에 결국 다시 마트로 와야 한다(1일 근무라도 월급은 받아야 할 것 아녀). 일을 못할 것 같으면 인사담당자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가장 좋다. 서로 편하고 덜 민망하게 안녕하는 방법이다. 저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 너무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인사파트장 역시 힐난하지 않는다. 퇴사서를 쓰고 퇴사 처리하고 다음 사람에게 연락해 면접을 본다. 그게 전부다.


Title Photo by afiq fatah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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