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주말도 없습니다.
주말이 사라져 버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중략)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인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 창세기, <성경>
하나님께서도 만물을 짓고 일요일 안식을 하셨으니, 지상의 사는 생명들도 그렇게 주말을 휴식으로 가졌다. 인간들은 월화수목금을 일하고 토일의 휴일을 가진다. 기독교에서는 각별히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란 뜻에서? 주일이라고 부른다.
종교 상관없이 토, 일의 나른함.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공기 가득한 여유로움과 몸에 밴 게으름이 맘에 든다. 알람 소리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아침밥은 간단히 넘어가도 아무런 질타가 없다. 메이크업과 머리 손질도 가벼이 넘긴다. 느지막이 2-3시의 따스한 볕에 신발 신고 나가도 되고, 그냥 쭉 집에 머물러도 아무런 제약이 없다. 다그치는 알람과 일정이 없는 빈 공간 같은 일요일이 사랑스럽다.
아이러니하게도 마트 일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주말이 오히려 시간을 유용하기 좋아서였다. 월화수목금은 아이들의 일정과 평일에 해내야 하는 것들에 늘 마음이 바쁘다. 주말에는 남편이 애들을 전적으로 케어가 가능하니 오히려 나는 나가서 일을 보기가 훨씬 수월하다. 시장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도 한 몫했다. 한 사람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면, 나머지 한 사람은 나가서 얼마라도 벌어와야지 않겠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말 근무가 필수인 마트는 오히려 내게는 기회처럼 느껴졌다. ‘남편과 역할을 바꿔 볼 수 있는 기회잖아?’ <엄마 휴직을 선언합니다>를 쓴 권주리 작가는 오롯하게 1년을 엄마가 바깥양반을, 남편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며 남편과 아내의 성역할 바꾸기를 시도했다. 나 역시 다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며, 주중에는 남편과 서로 일정을 조율해 아이들을 돌보고, 주말에는 온전히 남편이 돌봄과 가사를 나는 풀타임으로 근무하는 걸로 의견을 맞추었다.
내 계획은, 아이들의 일정이 많은 수/목을 정기휴무로 잡고, 월요일을 주간 출근으로 짜면 우리 일상이 그럭저럭 전처럼 유지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엄마 없는 휴일을 매번 보내는 것도 가혹하지 않아? 하는 문제는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시행으로 한 달에 2번 모두가 똑같이 문 닫고 쉬는 날이 있으니 그때 같이 놀면 되겠다며 위로했다.
그런데 일을 하면 할수록 신기한 것은 <월화수목금 토일>을 <금토일월화 수목>으로 바꿨을 뿐인데 내가 체감하는 휴식은 거의 0이었다는 점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몸은 지쳐가고, 아침에 일어나는 게 버거워졌으며, 늘 피곤함이 깃들어 있으니 아이들에게도 짜증이 많이 났다.
결코 수목은 토일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이 주일을 따로 만들어 두신 게 이해가 갈 지경이었다. 수목은 그냥 주중의 2일이었고, 내가 해야 할 또 다른 비즈니스 데이였다.
팀원들은 보통 스케줄을 짤 때 화금을 쉬거나 월토를 쉬거나 이렇게 요일을 건너서 쉬기도 했는데, 그게 좋다고 해서 그렇게도 해보았다. 결론은 하루를 쉰 것도 일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만을 경험했을 뿐이었다. 당최 그렇다면 이제는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이 피로는 대체 언제 푸나? 궁금해졌다. 스케줄 근무의 마력은 한 사람이 1주일을 전부를 생산성 있게 쓰게 한다는 것인데 그 때문에 우리는 매일 지쳐있었다. 휴게실에 가면 아침이고 저녁이고 꽉 짜진 마른걸레 마냥 사람들이 의자마다 널브러져 있었다.
그날은 휴게실에 앉아 잠시 쉬면서 등 뒤 소파에 앉은 여사님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퇴직도 곧인데,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현실적 고민들이 빈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 한식조리사를 따고 어린이집에서 아이들 식사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분이 한 분. 얼마 전 퇴직하고 곧바로 협력업체 판촉사원이 되어 다시 매장으로 복귀하신 분이 한 분.
다들 두 번째 인생을 골똘히 고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계발과 먹고사니즘의 문제는 평생의 것이구나 싶었다. 나는 앞으로 적어도 20년은 더 일해야 할 텐데... 미래에 대한 고민이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히는 듯했다. 현실감을 깨우는 건 이어서 조근히 덧붙이시는 세 번째 여사님의 말이었다. “다음번에는 교대근무가 없는 곳이면 좋겠어. 나는 야간근무는 이제 지겨워.” 우리 일의 가장 고단한 지점이 여기에 있었다.
숲세권 아파트에 사는 나는 가끔은 마감 후 걸어서 집에 가곤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섬유잡화의 여사님은 “어휴 생각 만해도 무서워, 그 큰길부터 혼자 걸어가는 건 아니지?”라고 몇 번이나 되물으며 “오늘은 차 타고 가”라는 말을 잊지 않고 건넸다. 나는 혼자 걸어가는 밤길이 대개는 무섭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별다른 준비 없이 맞이하는 내년이, 내 후년이, 내 앞날이 훨씬 더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