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을 해야겠다. 남편의 파타고니아 가방은 무지하게 편했다.
기본적으로 사이즈가 충분한 농구 가방 형태이면서도 백팩으로 맬 수 있다는 장점을 가졌는데, 실제로 가방을 내려놓고 물건을 넣고 꺼내기 편했고, 손으로만 캐리 한다면 무거울 가방을 등으로 짊어지는 것은 긴 여정의 이동에 용이했다.
처음 이 가방을 보고 나의 반응을 떠올려보면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 지경이다.
작년 11월 큰 아이와 실리콘밸리 여행을 다녀온 남편의 예산은 의외의 곳에서 탕진되었다.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유니폼과 같은 파타고니아 재킷을 꽤나 눈여겨보고 있던 남편이었다. 일본에서 근무하는 동안에 고베의 파타고니아 매장을 몇 번 같이 들렸으면서도 나는 그저 <이게 왜 유명해?> 정도의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환경과 사회에 대한 책임기업이라는 모토를 가진 이 브랜드는, 스타트업과 혁신의 상징인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즐겨 입는다는 후광효과로 그 이름 다섯 글자를 고유명사로 만들어버린 아웃도어 브랜드이다.
몇 개의 미국 현지 매장을 방문하며 남편은 본인의 재킷, 여성용 로스게토스 양털 플리스와, 국내에서는 잘 구하기 힘들다는 (본인 피셜) 퍼플의 파타고니아 가방을 구매했다.
돌아온 남편의 캐리어에서 나오는 파타고니아 제품들을 보면서, (사실 가격표를 보며) <플리스 재킷 가격 실화입니까?!> 하며 속으로 뜨악했었다.
그렇게 별로 쓰일 일이 없어 잠자고 있던 가방을 떠올린 건 2박 3일 서울 나들이를 위해 짐을 싸면 서다. 오랜만에 홀로 떠나는 여행에 노트북도 넣어야 하고, 옷도 몇 가지 넣어야 하고, 기타 일상 소지품을 챙기다 보니 늘 매던 백팩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파타고니아 가방이 사이즈가 꽤 넉넉했지? 창고 안 가방을 꺼내와 이것저것 넣으니, 웬걸 오늘 나 쓰게 하려고 사 온 가방이구나- 싶을 만큼 딱이었다.
자신의 니즈와 취향이 정확한 남편의 소지품은 이런 식이다.
니콘 70D의 카메라, 18인치의 맥북(크고 무겁다), 넓은 발볼을 커버하는 뉴발란스 574 시리즈, 샘소나이트 노트북 백팩, 네이비 캐시미어 머플러로 목을 한 번만 두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자신에게 어떤 브랜드의 제품이 편안한지, 만족감을 주는지 명확히 아는 자아를 가진 이.
반면에, 나는 자라면서 가성비에 휘둘려 취향이란 것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성비라는 기준은 의외로 자비가 없는 녀석이라 <가격에 비해->라는 문구로 모든 취향을 하나로 수렴시켜버린다.
<꼭 그게 아니면 어떤가?>에서 남편의 취향의 물건들을 공유하며 <꼭 이것일 필요가 있구나> 하는 태도 변화를 경험하고 있고, 그의 취향에 내가 묻어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중이다.
(저는 무던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좋은 게 좋은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다.
<오늘 4시간 동안 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는데도 손목에 무리가 없네, 역시 바이오~ (Sony사의 VAIO 노트북-대학 시절 남편 애장품)>
<키보드 누르면 백라이트도 들어오는데 ... 압니까?>
<아~ 이게 백라이트구나...(침묵) 여하튼 다른 키보드에 비해 오타가 거의 안 나서 그게 진짜 좋네요 인정. >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켜켜이 공감을 쌓아가며 만들어지는 소비의 하모니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