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알베르 카뮈, 알랭 드 보통, 나쓰메 소세키의 글들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는다. 대학시절 읽었던 책일지언정 최근 읽었던 작품보다 더 또렷이 떠오른다.
하루키가 그런가 하면 또 그렇진 않다.
그래도 하루키의 책이 서점에 놓여 있다, 하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6년 만의 신작 소설집이라는 띠지를 달고 있지만, 이건 소설집이 아니다. 정확히 분류하자면 에세이인데, 픽션이 가미된 에세이라고나 할까?
왜냐하면 등장인물이 하루키 본인이며, 그가 고교시절 혹은 대학시절, 더 나아가 30대 시절에 경험한 사람과 사건(event)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집이란 홍보문구가 에세이보다는 더 독자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거라는(내 생각). 전체 이야기가 하루키 본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다분히 소설적이긴 하다. (융합이다!)
하루키는 교토에서 태어났지만, 효고현 고베에서 자랐다(와세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번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이윽고 슬픈 외국어>에서 하루키가 유년시절을 고베에서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는 1990년대 하루키가 미국에서 지내며 글을 쓰고, 대학 강의를 다녔던 때의 경험을 풀어낸 에세이다. 하루키 개인에 대한 사실과 그의 취향&관심사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된 책이었다.
이 책(신간)은 한 손에 들어오는 판본 사이즈와 233페이지라는 분량으로 편히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었다.
더불어 수록된 단편 중 <크림>, <위드 더 비틀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고베에서 경험했던 유년기의 이야기다. (3번째는 유년기와 장년기까지의 이어진다) 기억 속 고베의 장소들에 서 있는 하루키의 모습이 그려지며 책 속의 이야기에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크림>에서 중학교 시절 같이 피아노를 배웠던 여자아이에게서 연주회 초대장을 받고, 내키지 않지만 참석하겠다고 회신한 하루키의 이야기가 나온다. 고베의 산에 위치한 공연장을 찾아가면서 그곳에 위치한 고급 주택가들을 보게 된다.
고베는 에도 막부 말기 외국인 거류지(기타노 이진칸)와 무역항이 건설되면서 번영을 누리게 된 도시다. 앞쪽으로는 넓은 바다가, 뒤쪽으로는 산이 이를 감싸고 있는 듯한 형태인데, 이 언덕 쪽에는 외국인 거류지와 고급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이런 대저택의 느낌인데, 여긴 사실 고급 주택가들 사이에 위치한 Takenaka Carpentry Tools Museum이었다(이런 느낌을 떠올려 보시길..)
<위드 더 비틀스>에서는 고교시절 처음 사귄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연애의 수순이 그렇듯 대학을 가며 새로운 이성에게 감정을 느끼며 첫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하게 된다. 이 장소가 롯코산인데, 롯코산은 고베에서 현지인, 관광객 모두 많이 찾는 곳으로, 롯코산을 오르는 케이블카가 유명하다.(아리마 온천까지 이어진다) 산 위에는 목장이 운영되고 있고, 숲을 직접 체험하는 액티비티들이 가득하다.
롯코산에 가려면 JR-케이블 탑승장까지 버스-케이블카-버스를 타고 가야 하나, 하루키는 여자 친구의 차를 타고 올라갔었다. 내려올 땐 여자 친구 혼자 가버렸기에 이렇게 타고갔겠지
언덕, 숲, 호수, 목장 등에서 다양한 액티비티가 가능한 롯코산.
8개의 단편 중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에는 하루키에게는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야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루키는 몇 개의 에세이에서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진구 구장의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경기를 보던 중 문득 소설을 적어야겠단 마음을 먹었다. 그 하루키가 아홉 살에 아빠와 갔던 야구장이 고시엔이다. 고시엔은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이며, 여름이 되면 전국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제는 단순 지역 홈팀의 홈구장을 넘어 고시엔 그 자체로 일종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하루키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고시엔 구장은 누가 뭐라 하든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장이다 (일인칭 단수,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p127-128)>라고 언급한다.
많은 소설과 에세이, 잡문집 등을 썼던 하루키도 어느새 70이 되었다. (1949년 출생)
내가 읽는 그의 소설 속 책날개의 모습은 여전히 40대, 혹은 50대가 채 되지 않은 모습이며,소설 속 그의 목소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데, 이렇게 물리적인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는 게 이상했다. 나도 처음 하루키를 읽었던 15살에서 그만큼의 시간을 더한 만큼 나이를 먹었는데 말이다.
신간 코너에서 하루키 이름 석자를 본다면 (村上春樹 한자로는 4자, 번역하면 7자) 발걸음을 또 멈추리란 것을 안다. 그의 6년 만의 이야기, 다음은 언제가 될까?
한신타이거스 프로팀을 운영하는 한신철도사(社)는 고시엔 덕을 톡톡히 보았다. 구장 전체를 덮고 있는 담쟁이 덩굴이 한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며 디자인적으로도 아름답다.
한산해 보이지만, 오후 경기 관전을 위해 엄청난(x100) 인파의 사람들이 대기 중이었다. 현장발권은 거의 불가능했다.(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