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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오드 Jan 10. 2021

라디오에서 나오면 차에서 못 내리는 노래

라디오를 좋아하세요?

한파에도 냉장고는 비어 간다.


나가는 길이 빙판길이라도 되면 아예 식료품 조달도 불가할 것 같아, 아이 둘 내복에 기모바지, 패딩까지 단단히 입히고 나섰다. 귤도 한 박스 사고, 삼다수도 6개들이 싣고, 빈 라면 상자에 한가득 장본 것을 담아서 차에 실었다. 집 앞에 도착해 트렁크 버튼을 누르고 내리려던 찰나, 2시의 라디오 진행자가 다음 곡을 소개한다.


<조규찬의 애기애기 듣고 가시죠->


<뭐야 유치하게> (피식.)


하면서도 잔잔한 간주와 함께 <음 Yeah it's been a long time>읊조리는 내레이션과 치고 들어오는


<후우우우우우- 헤에헤에예에에에에에- 허워허어- 예에에- >


조규찬의 'Baby baby'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반쯤 열리던 차 문을 다시 잡아당겨 닫고, 운전석에 앉았다.


온천욕 입구에 360도로 분사하는 샤워기처럼 노래는 대책 없이 나를 감싸고, 그 시절 라디오만 틀면 이 노래가 나오던 15살로 데려간다. (그 시절 PD 님들이 좋아하던 노래였을까, 라디오에서 정말 많이 들었다)


13살부터 차태현을 좋아해 '차태현의 FM 인기가요'를 듣게 되었고, 어느새 습관화 일상에  매일 밤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침대 옆 라디오는 늘 On 되었다.


어느 날은 라디오를 켜놓고 잠들어 아침에 영어방송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꿈결을 헤치고 들어오는 부드러운 영어 멘트들에 현실과 꿈속 중간 지점을 경험했다, 거실에서 이를 듣던 엄마는 내가 공부하는 줄 알았다고, 어익후)


'차태현의 FM 인기가요'가 끝나면 가수 김현철님의 팝 프로그램이 이어졌다.(본능적인 기억에 의존+fact 없음) MBC에서 어느 시절의 1TYM 송백경의 라디오 프로그램도 즐겨 들었다. 차태현 이후에 같은 프로를 가수 홍경민이 진행했고, 다음엔 한 시절을 호령한 '박경림&박수홍의 FM 인기가요'가 되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12시(자정) 프로그램과 더욱 친해지게 되었지만.


'손미나의 밤그대'(KBS 밤을 잊은 그대에게. 동시간대 SBS의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와 같은 대단한 경쟁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후에 '성시경의 푸른 밤', 성시경님이 늦깎이 입대를 하게 되며 클래지콰이의 알렉스, 정엽으로 이어졌다. 정엽님이 진행할 땐, 게스트로 브라운 아이드 소울이 나왔기에 올레! (나얼 등장)


10시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이소라의 음악도시'가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노래할 땐 예민 보스지만, 라디오에서는 편안함 그 자체인 이소라님. 그러면서도 프로그램 속 꼭지들은 대단했고... 코미디언 이병진님과 함께 진행하던 고민상담소를 들으며 DJ인 이소라님과 함께 정말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타블로의 꿈꾸는 라디오'도 오래도록 애청한 프로그램이다. 종영에는 타블로님과 같이 숨죽여 울었는데, 이유는 너무 아쉬워서였다. 엔딩 크래딧같은 '블로노트'는 라디오를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는데, 지금 떠올려보면 매일 타블로가 쓰는 한 줄 브런치 격이었다(+주뚜피라 불린, 주관이 뚜렷한 담당 pd였던 강희구 프로듀서님과의 티키타카도 참 재밌었다)


주말 낮에는 '윤종신의 두 시의 데이트', 이후에 '윤도현의 두 시의 데이트'(이때 고정 게스트가 무려 김어준 총수였다, 이때도 변함없이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했었다. 기승전 주어 없음으로, 지금이랑 똑같이 썰을 풀었었다) 윤종신 님은 이후에 '월간 윤종신', '라디오스타' 등 출연하는 예능과 본인의 작업 다 잘됐지만, 난 이때 두데를 진행했던 윤종신님의 재간과 그 시절 입담이 참 그립다. (다시 라디오 하는 때가 올까? 어렵겠지...)


그 시절 내 삶의 절반을 차지했던 라디오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은 단연, 마왕의 고스트 스테이션이다. (인터넷 방송으로 시작한 방송은 이후 SBS에서 정규 편성되고, SBS에서 막을 내린 후 MBC에서 고스트 네이션으로 편성되었다)


정말 뭔지도 모르고 들었다. 귀가하여 라디오를 켜놓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자정에 다다르고, DJ와 게스트와 함께 시시덕거리다 보면 어느새 2시가 된다. 2시를 알리는 시계음이 들려오면 마치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프로그램의 오프닝 음악이 들려오고(위아 더 칠드런 업 다우너 - (이건 마치 짧은 교향곡이다)), 다짜고짜 마왕의 썰이 시작된다. 말 그대로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랄까.

그런데 정말 2시에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새로운 세상은 그런 시간에, 모두가 잠드는 그 시간에 열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32번이었던 JYJ(그 J.Y.J가 아니다), 나는 31번이라서 항상 우리 둘은 무용 짝지였다.

완성형 얼굴에 참한 교복태를 뽐내던 JYJ가 고스트 스테이션 애청자였다.

현실에 그 프로그램을 듣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그 시절 라디오를 빼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15살 때 내가 생각하던 30대는 지금과 달랐다. 그때는 아예 선택지에 육아고 출산이라는게 없었으니까. 그런 세계는 나와는 무관한, 옆자리에서 엎드려 자는 같은 반 아이의 삶이 그럴지도 혹은, 저기 창 밖으로 보이는 어떤 여인의 삶이라고만 여겼으니까.


그래서 좀 이상했다.


앉아서 JYP처럼 목으로 리듬을 타며 노래를 듣고 있으니, 뒷좌석에서 룰렛으로 방울을 터뜨리는 게임을 하던 큰 아이가 물어본다. <엄마 왜 짐 안 올리고 앉아 있어요?>


그제야 나는 15살 나에게 안녕한다. <나 가야 해. 노래 참 좋네. 그치?>

Photo by @daniel_von_app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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