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오드 Jan 04. 2021

등산, 왜 똑같은 곳을 두 번 가?

너무 좋았거나 물건을 잃어버렸거나.

새해를 시작하며,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 올해 내가 잘하고 싶은 걸(long-term goal)로 새해를 시작할 거야! >

그래서 남편은 본인 유튜브 채널 관리로 한 해의 포문을 열었다.


다음은 아이들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공동목표는 육아, 단기 목표는 오늘 하루 잘 놀려서 밤에 잘 재우기다.(체력 소진과 꿀잠)


그래서, 동문에서 시작해 3.8km 능선을 타고 북문으로 도착하는 등산을 나서기로 했다.


늘 남편과 첫째가 떠나는 등산에 <잘 다녀와> 만 담당하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웬일인지 나도 가방을 들고 나서고 싶어 졌다. (새해 '의지'가 장착되었습니다)


고이 장롱 안에 접어둔 바람막이를 꺼내 입고 (방한용) 패딩을 돌돌 말아 가방에 넣고 있으니, 첫째가 내 바람막이를 보고 놀린다. <엄마 옷이 이상해요> (ㅋㅋ) 그래 이런 기능성 옷을 입으니 이상하게 보이겠지... 그래도 한 번 나섰다 하면 4시간은 기본인 남편 산행을 따라가려면 일단 옷부터 잘 챙겨 입고, 가방도 철저하게 싸야 한다.


203번 버스를 타고 동문에 내려서 초입에 힘써 걸으면 능선에 도착하는 황금 코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동네에 새해 눈까지 내려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황홀했다.

동쪽에서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갈수록 녹지 않은 눈이 많았다.

이 코스를 잘 아는 첫째가 셰르파마냥 앞장서서 걸어가는 걸 보니 아빠(남편이)가 그동안 많이 키워놓았네, 싶었다. (아이 둘 데리고 등산 나서는 남편을 보면 절로 우러러보게 된다)

3.8km를 걸어 북문까지 도착하여 광장에 남아있는 눈(snow)을 가지고 한참을 놀다가 해지기 전에 하산했다. (내려오는 길은 1.6km 거리, 나머지는 버스를 이용한다)


이만하면 새해 시작 괜찮지 싶은데, 앗차! 가방 사이드포켓에 있던 삼각대가 안 보인다. 남편의 촬영을 돕는 핸디형 삼각대. 점심 먹을 때까지 삼각대 세워놓고 찍는 걸 봤는데? 아까 북문에서 눈 고랑에서 넘어질 때 빠졌나?  <얼마 짜리지>, <5만 원 정도 줬지>, <내가 다시 가볼게 내일.>


다음 날,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가방을 멘 나는 다시금 여정에 나섰다.


같은 코스로 같은 여정을. (삼연휴의 마지막 주말, 아마도 혼자 있고 싶은 마음도 들었겠죠(내 마음의 소리))

첫날은 아이와 함께 vs 둘째날은 혼산(alone).. 여사님들을 일행삼아 가는 여정
작지만 단단한 등산 동지 vs 없는 둘째 날


어떤 이의 눈사람 작품, 1단으로 만든 독창적인 작품에 우리는 '웃는 얼굴'을 더해주었다. 다음날은 눈사람도 떠나고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풍경도 풍경인데, 부러져 나뒹구는 나뭇가지들이 모조리 접어놓은 삼각대처럼 보이는 것이었다.(어흑)


목적지에 도착하니, 어제 보았던 눈사람은 녹아 있었다.


삼각대를 찾을 순 없었다. 어제 하산하는 길에 줄이 달린 선글라스가 바위에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놓고 간 것이겠지. 그런데 그 선글라스도 없었다. <있을 리가 없지> 믹스커피 한잔을 마시며 몸을 녹였다.

 

아쉬운 마음에 정상 봉우리까지 다녀왔다. 첫째가 4번이나 올랐다고 나에게 자랑하듯 말한 이 산의 제일 놓은 곳. 학창 시절 때도 소풍으로 많이 왔었던 산이지만(늘 너른 북문광장까지만 도달했다), 이제껏 한 번도 오른 적 없었던 그 정상.


정상에 오르는 데크 바닥 틈새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세찬 바람이 머무는 곳인지,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패딩을 꺼내 덧입고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작고 까마득한 아랫 세상 속 작은 집에서 식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홀로 정상에 서 있으면서도 마음 한켠이 든든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말했다.

<산에도 치우는 분이 있나 봐, 어제 잃어버린 물건들이 없더라구, 아래서 위로 올라가며 떨어진 것들을 싹 다 치운 것처럼 보였어. 아무것도 없었어. 물건도, 눈사람도.>

새해 의지가 꺼지기 전에 정상에 올랐다. 2021 새해 같은 산을 두 번 오른 날의 기록.


작가의 이전글 또 책상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