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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오드 Jan 13. 2021

이방인

고베에 도착하고 3일 뒤, 한국에서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시작되었다.

고베항이 개항한 것은 1868년 1월 1일이다. 기타노초를 포함하는 거류지 주변지역을 일본인과 외국인이 함께 살 수 있는 공생 지역으로 지정하여 외국인도 집이나 토지를 빌릴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후에 고베 기타노 이진칸 거리로 불리게 되었다.


현존하는 이진칸(서양식 건물)의 대부분은 고베에 살던 영국인 A.N.한셀과 일본에서 설계 사무소를 설립한 독일인 D.G.랄란데 등으로 대표되는 외국인 건축가들에 의해 지어졌다. 고베 이진칸의 설계 수준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우수한 외국인 설계사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고베는 개항으로부터 10년이 흐른 뒤였기 때문에 일본인과 외국인 모두 서로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흡수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던 때였다. 이것이 이제껏 일본에서 볼 수 없었던 고베 특유의 문화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일본의 근대화 역사와 고베의 고유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 주목받는 고베 기타노 지역. 그 역사적,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0년에는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1)



고베는 이른 개항을 맞이 했던 항구도시답다. 거리도, 건물도, 먹거리들도 이국정취를 뽐낸다.

크루즈선이 정박하는 메리켄 파크는 고베 하면 떠오르는 대표 이미지다. 

야경을 보러 많은 관광객이 찾으며, 주말에는 너른 공원 광장에서 다양한 지역행사가 열리곤 했다. 


메리켄 파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이동하면 구거류지(舊居留地)가 나온다. 주로 많은 오피스들이 여기에 위치해 있고, 시청과 같은 관공서들, 오랜 세월 수집한 물품들을 전시한 개인 박물관부터 시립박물관까지 운영 중이며, 다이마루 백화점을 필두로 한 유명 명품점들이 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는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국의 정취는 낯선 도시에 도착한 우리를 반겨주는 듯 했다.

우리가 고베에 도착한 날까지는 별일이 없었다.


별일은 그다음 날 찾아왔다.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한일회담이 무산되는 일이 발생했다(2). 이 여파로 평탄하던 한일관계의 불협화음이 시작되었다. 일본에선 수출허가절차를 면제하는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한국은 개인차원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시작하며 이것이 어떤 국면을 만드는 듯했다. 갓 일본 생활을 시작한 우리를 걱정하는 연락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고베에서 생활은 별 일이 없었다. 평소처럼 일상을 지냈고, 주중에 다닌 마을 과학관 같은 곳에서는 우리 집 아이 둘 뿐이었는데도(버젓이 한국말만 하는) 담당 선생님은 과학 실험을 시연해주었고, 식당에서는 서투른 일본어로 주문할지언정 옆 좌석과 다르지 않은 메뉴가 제공되었다. 사실 고베에는 이미 많은 외국인이 살고 있었다. 우리 집은 언덕 쪽 일반 주택가였는데 집 근처에는 중국인 학교가 있었다. 초중등을 수용하는 규모가 있는 중국인 학교가 있었기에 아침에 분리수거하러 나서면, 삼삼오오 모여 등교하는 재일 중국인들을 마주치곤 했다.


냉랭해진 국제관계와는 상관없이 편하게 지냈던 날들이다. 복잡미묘한 감정의 기류는 미디어에서만 접할 수 있었다.(여기 뉴스에서 오히려 한국 문재인 대통령을 더 자주 보았고, 비슷한 빈도로 북한 소식도 전해졌다.)


최근에 흥미로운 책을 읽었다. 

브래디 미카코 작가의 <나는 옐로 화이트에 약간 블루>이다. 책 제목이 멋져서 집어들었는데 다양성에 관한 작가의 통찰에 감탄하며 다시금 읽고 있는 중이다.

일본 후쿠오카 출신인 작가는 영국인 남편과 결혼해, 현재 영국에서 살고 있으며 7학년(우리 나이로 하면 중1 정도)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다. 주로 아이 학교에 관한 이야기와, 이방인으로 살며 영국 백인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받은 인종차별에 대한 경험담, 아시아인에 대한 사회 인식과 그에 따라오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3)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여름방학을 맞이한 아이를 데리고 고국인 일본을 방문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가 인상깊었다. 그녀의 아이는 영국인 아빠보다 일본인 엄마를 닮아 아시아인의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 그러나 일본어는 전혀 하지 못하고, 영어로만 대화한다. 그런 아이를 보며 식당 옆자리의 중년 일본 남성은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는 그녀를 비난하고, DVD가게의 직원은 본토 일본어를 완벽히 구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같은 일본인인 그녀를 차별 대우한다. 그녀는 이 경험에 덧붙여 이렇게 적었다. 

<애초에 일본인인 내가 왜 일본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단 말인가.> <일본에 돌아갈 때마다 저 점원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은데, 과연 내가 너무 신경질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나는 그녀의 아들처럼 이들의 언어를 다 이해하지 못해서 나에게 닿은 차별을 인지하지 못한 걸까. 고베의 많은 이방인들처럼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었던 걸까. 책을 덮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모자이크에서 바라보는 메리켄파크 - 메리켄파크에 저녁이 내려앉는다 - 늘 쨍한 하늘
메리켄파크에서 도보 10분이면 구거류지에 닿는다 - 100년 이상 된 건물들이 여전히 오피스로 사용중이다 - 다이마루백화점
기타노 이진칸 모습(4) - 1907년 건물을 리모델링한 스타벅스 기타노 이진칸점이 유명하다 - 모자이크(쇼핑거리)
집 근처의 Chinese School - 아이들과 산책 - 집 근처의 유아보육기관인 St.Michaels Nursery
주 1회는 갔던 물과학 박물관, 늘 선생님이 계신다. 이날은 일본인 가족이 함께했다. 언어는 달라도 과학은 통했다(!)



(1) Kobe Kitano Ijinkan Uroko group (kobe-ijinkan.net) 참고문헌: <고베학> , 고베신문 종합 출판센터, 2006년

(2)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주최국 일본과 대한민국 간에 한일회담 회산이 무산되는 일이 발생했다. 한일 회담이 무산된 이유로는 군속 동원 근로 징용자에 대해 배상하라는 재판 결과가 나오는 등 한일 정부 양 측의 외교 분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분석하였다. 이와 관련 대한민국 정부는 G20 정상회의 직전, 상대측과 사전 합의 없이 '한·일 기업 공동 기금 조성안'을 내놓아 이에 일본 내에서 비판이 일어 약식 정상회담도 갖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2019년 오사카 G20 정상회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3) 정치적 올바름(政治的 -, political correctness, PC)은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민족·언어·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특히 다민족국국가인 미국 등에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차별·편견을 없애는 것이 올바르다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하게 된 용어이다.

이 주장 가운데 일부는 언어의 문법 구조가 그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사피어-워프 가설과 관련되어 있다. 일부 언어학자들이 어떤 종류의 언어를 쓰느냐가 인간의 사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고 여기고 있지만, 이 가설을 확대해서 해석하면 언어가 인간의 사고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고 볼 수도 있다. 곧 성차별적인 어휘를 쓰면 성차별주의자가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4) 이미지 출처 이인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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