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_11개의 나

by BONNIE C


한 여자


한 여자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손에 들고 잡지를 읽고 있다. 40대 후반처럼 보인다.

아크테릭스 티셔츠에 잠발란 울트라 라이트 등산화를 신고 있다. 양말은 울 양말일 것이다.

어쩌면 낙타의 털로 만든 양말일지도 모르겠다. 히말라야 한 번쯤 다녀왔을 백패커일지도 모른다.



젊은 여자


나는, 허리 24인치 젊은 여자의 몸에서 나왔다.

그 여자는 너무 배가 고팠다. 나도 배가 고팠다.


젊은 여자의 어린 남동생이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

맛이 없었는지 수저를 빨리 놓아 버린다.


젊은 여자는 남동생에게 나를 맡겨두고 목욕탕에 갔다.


나는, 고작 갓난이.


미역국도 먹지 못하고 빽빽 울어대는 나에게 젊은 여자의 남동생이 코를 내주었다.

나는 그의 코를 허겁지겁 빨았다.



어린애가 벌써부터


“어떻게 이걸 참았대?”


의사 선생님은 눈을 크게 뜨고, 나와 엄마를 번갈아 본다.

편도가 붓고 고열에 시달렸는데, 어이없다는 눈치다.


“흰 죽 먹이세요. 어린애가 벌써부터 참을성이 많아서 원.”


미음은 더운 불에 여러 번 휘저어야 한다.


미음은 눈처럼 고왔다.



몸을 싣는다


“오른손잡이입니까? 왼손잡이입니까? “

“오른손을 주로 씁니다.”

“그럼, 왼발로 짚고 일어서면 되겠네요.”


철썩 때리는 차가운 기운이 발에 닿는다.


“모두 따라오세요.”


강사는 휙휙 팔을 저어 앞으로 나아간다.


악수를 하고 천천히 안기듯이 몸을 싣는다.

한 발 한 발 떠밀려 앞으로 나아가며 잠긴다.

철썩 목에 부딪친다. 입술이 짜다.

애초 들은 말과는 다르다. 이렇게까지 깊으면 안 되는 거였다.


“빨리 오세요.”

“처음이라서 못 해요. 수영 못 한다고요!”


힘껏 외쳐 보지만 들리기는 한 걸까? 너무 멀리 있다.


“슈트 입었잖아요. 가라앉지 않아요. “


누군가는 날 구해주겠지. 뜬금없는 믿음은 어디서 생긴 걸까?


“몸을 보드 끝으로 옮겨 앉으세요.”

“그럼 벌러덩 뒤집힐 텐데요!”

“보드에 발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세상에, 발도 닿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지 야속하다.


“이제, 보드를 놓으세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를 안아준다.

이 바다가 이렇게 따뜻했던가.




가끔은 뇌가 헐고 아픈 날이 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날에는 ‘무감각 크림’을 바른다.



덥히다


데드리프트 60kg 15개 4세트

심장을 데운다.


밖은 영하 2도


짧은 머리가 앙칼진 바람에 찔린다.

뛰어야겠다. 머릿속 덥혀 주게.



노트는 서로 물어뜯지 않고


빨간불이 녹색불로 바뀐다. 급하게 달렸다. 왼쪽 허벅지가 젖었다.

무슨 일일까 가방을 뒤져본다. 물병이 토했다. 바닥에 있던 작은 노트가

이제 막 임종을 앞둔 노인처럼 쭈글해졌다. 글자들이 파랗게, 빨갛게,

검게 번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 살려야 할 글자들이 많다.


”물기를 잘 닦아봐요. 그리고 냉동고에 넣어요.”

심폐소생 응급처치하는 마음으로 꾹꾹 눌러 물기를 제거한다.

얼어서라도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빈다. 하루가 지났을까.


노트는 서로 물어뜯지 않고 넘겨지는 힘을 얻었다.



어느 어미


“아고, 아가씨였어?”

“네?”

“난 울 아들인 줄 알았어.”


짧은 머리 탓에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항상 아파트 정문에 홀로 앉아 계시는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려니 웃고 지나치니 할머니가 따라나선다. 다리가 많이 벌어져서 빨리 걷지 못하신다.


“ 몇 층 가?”

“15층요.”

“난 13층. 좀 눌러줘.”

“네.”

“울 아들 오면 같이 올라가려고 했는데 늦나 봐.”

엘리베이터가 서고 할머니가 내리며 내 손을 꼭 잡는다.


“고마워.”


낯선 어느 어미의 손이 따듯하다.



슥슥슥


샤프펜슬이 없으면 책을 읽지 못한다. 수집하고 싶은 문구, 문장 그리고 문단이 나오면

마음 붙드는 단어에는 별, 첫 소절엔 특수문자(*) 표시를 해야 한다.


슥슥슥, 세 번의 소리. 별이 달려야 비로소 수집된 글자들이 내 곁에 머문다.

샤프펜슬을 여기저기 둔다. 침대, 주방, 소파 테이블, 책상에 올려둔다.

욕실에도 둔다. 동시에 3권의 책을 읽어야 할 때는 각각의 책에 샤프펜슬을 끼워둔다.


그러면, 글자들은 도망가지 못한다.



이제 알겠지


거봐, 내가 괜한 걱정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백패킹 장비가 너무 비싸서 청약저축을 깨야 할 때도

비행기가 추락이라도 할까 봐 엄마 걱정이 심해

계획을 미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할 때도

행여 발목이라도 삐어 실려 갈까 봐 두려울 때도


막상 걸어보니, 바람이 불어도 텐트는 무너지지 않았고

비가 쏟아져 고스란히 맞아도 몸으로 새어들지 않았고

살얼음 깔린 바위 사이를 건널 때도 미끄러지지 않았지.

들쥐가 배낭을 물어뜯지도 않았고

소름 끼치는 뱀을 딱 한 번 마주한 게 다야.


이제 알겠지. 걱정은 미리 하는 게 아니란 걸.



혹시,


왜 사서 고생하냐고 핀잔받을 수 있습니다.

무릎 관절 나간다고 협박받을 수도 있습니다.

얼굴에 기미 생길까 봐 겁먹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을 귀찮게 한다는 오해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별이 총총거리는 하늘 아래에서

일당백인 사람들과 함께,


비를 맞아도, 땀이 흘러도, 흙먼지가 쌓여도

실실 웃어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