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시간이 있을까

지식은 잊혔지만 감각은 남는다.

by 조자연

나는 지금 기술과는 거의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


한의사로서 몸의 흐름을 읽고, 통증의 방향을 찾고,

말과 맥과 표정을 보는 세계에 머물러 있다.


한의학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기(氣)와 순환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결국 한의사의 손이고,

손에 잡은 침이 환자의 몸에 닿을 때의 감각이다.


어쩌면

매우 비물질적인 분야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주 물질적이고

몸에 가까운 일들이다.




그래서 요즘

AI, 스테이블코인, 양자컴퓨팅 같은

최첨단 기술의 흐름은


물질적인 직업생활을 하는

내 삶과는 더더욱 동떨어진 세계로

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나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다.

어렵다거나

딴 세상의 이야기 같다는 느낌도

거의 들지 않는다.


왜일까,

생각하게 된다.



20년 전,

나는 최첨단의 기술을 다루던 세계에 있었다.


그 시절 배운 지식은

그때로서는 최첨단이었겠지만

패러다임이 바뀐 지금의 기술 환경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세계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내가 그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세계를 감각적으로

한 번 통과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배운 것은 기술이 아니었다.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과제를 하던 친구들,

무언가를 해결하려고 밤을 지새우던

불이 잔뜩 켜진 공학관,

머릿속에서 늘 무언가를 돌리고 있던

그들의 표정.


그들과 함께였던 학생식당,

MT,

축제의 밤,

그 공간의 공기였다.




나는 아직도

그들이 무엇을 좋아했고,

어떤 것에 집착했고,

어떤 질문을 던졌고,

무엇을 풀어내려 했는지를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기술 담론들이

완전히 먼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의 세계가

마치 코앞에서 스쳐 가는 느낌,

그들의 숨결이

아직 이 공간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




돌이켜보면 나는

컴퓨터공학이라는 학문 자체에는

크게 애정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 세계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들의

열정과 삶의 방식,

사고의 구조와 리듬을

더 많이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블록체인의 구조보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던

그들의 가느다란 손이 먼저 떠오르고,


AI를 보면서도

그들의

열정적으로 빛나던

까만 눈망울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새삼 깨닫는다.


사람은

무엇을 배웠는지가 아니라

어떤 세계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떤 공기 속에 있었는지를

훨씬 더 오래 기억한다는 것을.


지식은 사라져도

그 세계의 사고방식과

그 안의 분위기에서

완전히 멀어지지는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지나온 길 중

정말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시간이

과연 있을까.


그 시절이 만들어 놓은 것들은

지금 나의 선택과 생각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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