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믿는다'는 말에는 두 번째 의미가 있었다
내가 20대 초반이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우울의 늪에 푹 빠져있던 시절.
어느 날, 고향집에서 밥을 먹고 일어나는데
맥락 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믿는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그때의 나는
앞으로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상처와 막막한 미래 사이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었다.
그 문장이 왜 떠올랐는지 묻는다면
지금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아마도 내 안의 아주 깊은 곳에서
나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 같은 게 올라왔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이해한
'나를 믿는다'는 말은 이런 뜻이었다.
"설마 내가 나를 굶게 하겠어."
"나는 어디서든,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야."
그때의 그 문장은
최소한의 생존에 대한 신뢰였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굳은 믿음.
내용은 '최소한의 생존'이었지만
그 말의 의미가 몸으로 체감되는 순간
그 깨달음은 결코 '최소한'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불안이 치밀어 오르거나, 어찌할 바를 모를 때마다,
나는 항상 그 말을 붙잡아 왔으니까.
내가 감각적으로 알게 된
'나는 나를 믿는다.'라는 말은
나는 절대 내 생존에 대해
방관하거나 멀리서 지켜만 볼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최소한의 생존 기반에 늘 불안이 있었던 나는,
그때 느꼈던 그 순간의 강렬한 확신 하나로
힘든 순간을 참 많이도 지나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최근 나는
전혀 다른 결로 같은 문장을 떠올리게 되었다.
스스로 인생의 큰 갈림길 앞에 섰을 때,
오래 망설이던 그 방향을
왜 나는 그렇게 선명하게 선택하려 하는지
그 이유가 너무 명확해지던 어느 날.
문득 그때의 문장이
다시 내 안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나를 믿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이번의 '나를 믿는다'는 말은
더 이상 생존의 안전을 확보하는 다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감각과 기준으로 삶을 설계해도 된다는
능동적인 신뢰였다.
'내가 내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어.'
'나는 나를 성장시키는 방향을 알고 있어.'
'내 직감이 여기에 도달한 데에는 이유가 있어.'
'나는 내 선택을 책임질 수 있어.'
40년 넘게 살면서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었던 나에 대한 신뢰가,
그날 이후 나를 단단하게 세웠다.
20대의 나에게
나는 나를 믿는다는 말은
'최소한 내 생존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필사적인 생존감이었다면,
지금의 나에게 그 문장은
'내 삶은 내가 설계할 수 있다.'는
나의 감각과 결정을 신뢰하는 것이다.
이 두 차이를
20년이라는 시간이 천천히 메웠다.
앞으로도 삶의 어떤 순간에
내가 이 문장을 또 다른 어떤 의미로
다시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에게
이 말은 더 이상
생존의 다짐도, 용기의 주문도 아니다.
이 말은
삶을 스스로 설계하는 일에
수많은 굴곡을 넘어온 내가
마침내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해하게 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