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마다 돌아오는, 별것 아닌 행정업무가 남기는 것
오늘은 한 해의 정보를 정리하는 날이었다.
작년 한 해 동안의 재료비 구입내역을 신고하고,
환자분들의 연말정산 자료를 올리고,
차트와 기록들을 정리하는 날.
행정업무는
개원의들 사이에서
가장 번거로운 일의 최상단에 위치한다.
나도 나름
개원의 생활에 뼈가 굵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미루고 마는 일이
바로 행정업무이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정보를 정리한다는 건
결국 시간을 정리하는 일이라는 걸,
오늘은 몇 번이나 느꼈다.
오랜만에 본 환자의 이름 앞에서였다.
이름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말이 나온다.
아 맞다.
이 분은 그 이후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어머니가 많이 안 좋으시다고 마지막에 이야기하셨는데...
그리고 그 이름 아래로 시선을 천천히 내려가면,
그다음 생각이 따라온다.
그의 마지막 내원이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정확히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날의 공기와, 그분이 나가던 뒷모습이
차트보다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이후로 방문이 없었다.
아주 가끔은 그런 환자가 생긴다.
내가 잘못했다는 확신도 없고,
내가 최선을 다했었다는 확신도 없고,
그 사이 어딘가에 남아 있는 찝찝함.
이름 앞에서 잠깐 멈춰 서게 되는 이유는
사실 그 환자 때문만은 아니다.
나 자신에게서 멈춘다.
'그때 내가 조금 더 물어볼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단정적으로 판단한 건 아니었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더 했어야 했던 건 아닐까'
그러 문득 시간을 계산한다.
벌써 1년이 지났네.
...라고 생각했다가,
다시 스스로에게 놀란다.
아니네.
별로 안 되었네.
바로 1년 전에 내원했었구나.
'벌써'와 '바로'는
같은 1년을 두고도
전혀 다른 온도로 말해진다.
어떤 1년은 아주 긴데,
어떤 1년은 너무 짧다.
차트에 찍힌 날짜는 정확한데
내 마음속 시간은 제멋대로다.
오늘 내가 한 일은
서류를 정리하고, 항목을 맞추고, 제출 버튼을 누르는 일이었지만,
사실은 그 사이사이에
이름들을 조용히 다시 만나는 일이었다.
환자를 진료한다는 건
그날의 치료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잠깐 맡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래 안 오는 환자의 이름을 보면
'다 나으셨나'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기셨나'
그것만 떠오르지 않는다.
그 환자의 생활은 괜찮아졌을까.
그 어머니의 건강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 나와의 대화는 어떤 온도로 남았을까.
오늘 같은 날에는
그 질문들이 더 또렷해진다.
한 해의 정보를 정리하는 날이라서였을까.
나는 내가 돌봤던 시간들을
조용히 다시 접어 넣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마음속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마음을 다하고 애썼던 순간들'
행정업무가 무거운 이유는
번거로워서가 아니라
이렇게 한 번씩
이름 하나로 나를 멈춰 세우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멈춤 속에서 나는
치료자로서의 나와
여린 인간으로서의 나를 동시에 만난다.
오늘은 그런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