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만들어내는 신체적 반응 (13)
기억력 저하(브레인포그)는 의외로
연령과 무관하게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증상은
“나이 들어서 그런가?”
“치매의 시작인가?”
하는 불안이 함께 붙는 증상이라,
작은 변화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리곤 합니다.
그런데 막상 병원 검사를 해보면,
뇌 MRI도 특별한 이상이 없고,
혈액검사도 크게 문제 없고,
"스트레스 때문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검사에서 이상이 없다는데도,
업무가 손에 잘 안 잡히고,
대화 중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고,
하던 일을 까먹고,
책을 읽어도 내용이 남지 않는 느낌이 반복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신을 탓합니다.
"내가 다른데 신경쓰느라 집중을 안 해서 그런가봐."
"요즘 내가 너무 생각을 안하고 사는 것 같아."
하지만 기억력 저하의 원인이
의지나 성격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력은 뇌의 기능이지만,
뇌는 몸 전체의 상태
- 수면, 염증, 면역, 순환, 호르몬 -
에 의해 매 순간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는 감정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정적 자극이 반복되면
뇌는 ‘위협 상황’으로 해석하고,
자율신경계와 HPA축(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축)을 통해
몸을 긴장 상태로 유지합니다.
이때 뇌가 가장 먼저 포기하는 기능은
"깊은 사고"와 "기억의 정리"입니다.
급한 상황에서는
깊이 생각하고 정리하는 것보다
빠르게 반응하고 버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기억력 저하는
뇌가 망가져서라기보다
뇌가 '생존 모드'로 오래 고정된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과정에서 감정은
'염증', '면역', '순환'에 영향을 주고,
이 세 가지가 다시 수면과 뇌 기능을 흔들면서
'브레인포그'를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기억력 저하에서 자주 놓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큰 염증이 아니라
'저강도 염증(low-grade inflammation)'입니다.
감정적 긴장이 길어지면
염증 신호(사이토카인)가 완전히 꺼지지 않고
낮은 강도로 지속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염증 신호는
뇌의 주의력과 작업기억(working memory)을 떨어뜨리고,
"머리가 뿌옇다" "머리에 안개가 낀다"는 느낌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염증이 기억력에 영향을 미치는 기전
(1) 집중력 회로의 둔화
염증 신호는 전두엽 기능을 둔하게 만들어 멀티태스킹이 어려워지고, 사소한 실수가 늘어납니다.
(2) 피로와 동반 악화
염증 톤이 높으면 피로가 깊어지고, 피로는 곧 기억력 저하로 이어집니다.
(3) 수면의 질 저하
염증은 깊은 수면을 방해하고, 깊은 수면이 줄면 기억이 정리되지 못해 다음날 "머리가 비어 있는 느낌"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브레인포그가 심한 사람을 보면
몸 전체가 예민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기 후 회복이 느리다
구내염이나 인후 불편이 반복된다
피부나 장이 같이 흔들린다
생리 전후로 특히 멍해진다
면역이 단순히 약해졌다기보다
면역-신경계 조절이 불안정해진 상태에서
뇌 기능도 함께 흔들리는 패턴입니다.
이때는 뇌를 "더 쓰는 것"이 해결이 아니라,
몸이 회복 모드로 전환될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기억력 저하를 호소하는 분들이 흔히 말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머리가 멍해요."
"오후만 되면 뇌가 꺼지는 느낌이에요."
이런 경우 순환은
혈압이나 큰 혈관 문제보다
미세순환과 자율신경성 혈류 조절의 문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긴장이 지속되면 교감신경 우위로
말초혈관이 수축하고,
뇌로 가는 혈류의 '조절'이 매끄럽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검사상 산소포화도는 정상인데도
- 멍함, 집중력 저하, 두통, 눈의 피로-
가 함께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과호흡 경향이 있는 사람은
호흡이 깊어지거나 빨라지는 순간 CO₂가 떨어지며
뇌혈관이 수축해 “멍함”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실수록
더 멍해지는 사람에게서 흔합니다.
불안과 긴장이 지속되면 수면이 얕아지고,
수면이 얕아지면 염증 톤이 올라가고,
염증 톤이 올라가면 피로와 멍함이 심해지고,
멍함이 심해지면 "큰일인가?"라는 불안이 커집니다.
그리고 그 불안이 다시 자율신경을 올려
뇌를 '생존 모드'에 붙잡아 둡니다.
브레인포그는 이렇게
몸-감정-뇌가 서로를 밀어 올리는 구조 속에서 유지됩니다.
한의학에서는 기억력 저하나 멍함을
단순히 "머리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기혈이 충분히 뇌로 올라가야 정신이 맑아지고,
그 흐름이 막히거나 부족하면
생각이 흐려지고, 집중이 어려워진다고 봅니다.
간기울결(肝氣鬱結)
감정 정체가 있을 때 흉민, 한숨, 두통, 멍함이 같이 나타나기 쉽습니다.
담탁(痰濁)
몸이 무겁고 머리가 뿌연 느낌, 식후 졸림, 가슴 답답함이 함께 오는 패턴에서 자주 봅니다.
기혈허(氣血虛)
회복력이 떨어지고 쉽게 피로해지며, 기억이 잘 안 붙고 말이 느려지는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신허(腎虛)
장기 소모 이후 집중력 저하, 의욕 저하, 아침 멍함이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기억력 저하는
검사로 잡히는 "구조적 이상"과
몸의 리듬이 흔들려 생기는 "기능 저하"가 섞여 있습니다.
전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후자를 봐야 합니다.
특히 수면, 피로, 불안, 식사 리듬이 무너졌을 때의 브레인포그는
뇌가 고장난 것이 아니라
뇌가 '정리할 시간과 조건'을 잃어버린 상태일 가능성이 큽니다.
1. 수면을 ‘시간’이 아니라 ‘구조’로 보기
잠을 오래 자도 개운하지 않다면 깊은 수면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취침·기상 시간을 고정하고, 취침 전 자극(카페인/업무/화면)을 줄이는 것이 우선입니다.
2. 혈당 변동 줄이기
브레인포그는 식후에 심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침 단백질, 점심 과식 피하기, 단 음식/빵 위주의 식사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오후 멍함이 줄어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3. 호흡을 점검하기
멍할수록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습관이 있다면
길게 내쉬는 호흡으로 과호흡 경향을 먼저 낮춰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4. 하루의 뇌 사용량을 조절하기
멀티태스킹은 브레인포그를 악화시키는 대표적인 조건입니다.
한 번에 하나씩, 작업 단위를 줄이는 것이 오히려 기억 회복에 유리합니다.
5. 감정 기록하기
멍함이 심한 날의 감정 사건, 수면, 식사, 카페인, 생리주기를 함께 기록하면
'왜 하필 그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억력 저하는 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정이 자율신경을 흔들고, 그 결과 염증·면역·순환의 톤이 바뀌면 뇌는 더 이상 맑게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검사에서 큰 이상이 없다고 해도, 내 몸이 어떤 조건에서 멍해지는지, 어떤 리듬에서 기억이 떨어지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브레인포그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