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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Oct 23. 2020

기억이 나지 않아

오늘은 장을 봤다. 딱히 먹고 싶은 요리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예전엔 뭔가 해보고 싶은 요리가 있어서 장을 봤는데 요즘은 요리에 없어서 안 될 부재료를 챙기는 식이다. 가끔은 집에 있는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생각하기도 한다. 우유가 있으면 화채를 만들고, 미역이 있으면 조갯살 미역국을 만든다. 하지만 오늘은 나에게 요리를 생각할 만한 재료가 없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와야 했다.


시장으로 가는 길에 망원동의 채식당에서 두부 덮밥을 먹은 게 기억이 났다. 데리야끼 소스를 만드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간장과 맛술은 집에 있어서, 대파와 양파를 사고, 내 입맛에 더 맞추기 위해 고추도 샀다. 빵 가게 앞에서 약간 서성였고, 쌍문동 할머니의 자전거 바구니 안에서 덜덜 떠는 새끼 몰티즈도 봤다. 약국 앞에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 안에 있는 커피테이크아웃 전문점에서 커피를 살까 고민도 했다. 유리 문에 붙어있는 흑당 밀크티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제주 탑동 시장 안에 있던 작고 예쁜 카페가 기억이 났다.


엄마가 자취방에 찾아오면 가끔 시장에 가서 광어회를 사 먹곤 했는데, 그날은 어째서 인지 카페를 갔다. 스무 살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재수생이었지만 사실 아무 공부도 없이 패션재수를 하고 있었고, 엄마는 이런 나를 모른 척해주고 있었다. 옥돔 가게와 반찬가게 사이에 위치한 그곳은 내 예상보다 예쁘게 꾸며있었다.


우리가 거기를 갔을 때 무슨 얘기를 했지? 카페에서 커피를 기다리면서 열심히 생각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여기까지 썼으면 적어도 엄마의 비밀도 얘기하고 카페를 나오니 저녁이 돼있었다는 얘기도 써주고 결말 부분에 모녀 사이 유대감을 보여주면서 훈훈하게 글을 마무리하면 참 전형적이고 좋을 텐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시장 속에 너무 예쁜 카페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곳의 커피 맛이 꽤 좋았고 옆집 옥돔은 꽤 비쌌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그때 제정신이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육 년 정도면 꽤 시간이 지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났다고 이렇게 쉽게 잊을 수 있다는 게 문득 부조리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왜 기억나는 게 없고, 미래는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나에게 찾아와버린 걸까? 채소가 든 에코백을 고쳐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와 예전 블로그를 들어가 보았다. 들어가자마자 과거와 미래가 만난 것처럼 첫 문장이 이랬다.  


기억은 보석처럼 닦이고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잊히다 만 것들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잊힌 거고, 앞으로 잊힐 거라 생각하니 무섭다.


고백하자면 엄마와 내가 광어회를 먹은 일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가 광어회를 먹었던 순간이 지나고 한참 뒤에 엄마의 겉옷 주머니 속에서 영수증을 발견한 기억만 있다. 대파도 양파도 없이 광어회만 적힌 영수증을 보며, 피로한 어른으로 사는 와중에 남을 먹이려고 하는 행위에 대해 조금 생각에 잠겼을 뿐이었다. 기억이 이렇게 이기적이다.


그때의 일을 물을 겸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동문시장의 카페에 대해 물어봤고, 엄마는 내가 글 때문에 전화했다고 하니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우리가 간 그곳은 천주교 신자인 엄마와 친했던 신자가 연 카페였다. 내 기억과 달리 그곳은 그렇게 예쁜 곳이 아니었다. 시멘트가 깔끔하게 발리지 않은 벽을 작은 소품으로 장식한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신자분께 그곳이 아름답다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나에게 언제 내려오냐고 물었다. 나는 이번  말에 내려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때쯤이면 봄이 찾아와 있을 것이고 공기도  물컹할 것이다. 엄마에게 바다에 가겠다고 했고 엄마는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문화공원 티켓도 있으니 같이 가자고도 했다.


그때 내가 두려웠던 건 기억을 잃는 게 아닌 모양이다. 어떤 사람, 어떤 추억이 너무 좋아서 그 뒤에 더 좋은 것이 있을 거라고 기대한 것 같다. 제주에 가면 사진을 할 수 있는 한 예쁘게 찍어야겠다. 그리고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 잊어버려야지. 지난 추억을 아름답게 오해할 미래의 나에게 좋은 선물을 줘야겠다. 과거의 내가 했던 말을 무시하고 기억을 닦고 닦아서 빛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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