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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Oct 23. 2020

피부묘기증

피부묘기증. 이 질환의 이름을 몰랐는데 최근에야 알았다. 인터넷에 피부묘기증을 검색하다가 여전히 심한지 궁금해서 펜으로 팔뚝을 긁어 봤다. SHE라고 썼다. 예전엔 증상이 심했는데 지금도 심하네. 부어오른 SHE를 보면서 생각했다. 가끔 장난을 치다가 피부가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 경악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다들 미안해했다. 말이 주는 상처도 이렇게 눈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자연스럽게 초등학생 때 기억들이 떠올랐다.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구엄 바다에 뛰어들었던 기억, 지금까지도 만나는 동창의 옛날 집과 냄새도 기억이 났다. 열두 살 때 날 지독히 싫어했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애는 시소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며 대놓고 '네가 싫어'라고 했다. 당당하게 내가 싫다고 하는 그 애의 표정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요즘은 취직 준비 때문에 자소서를 쓰고 있다. 대학 가려고 따놓은 영어점수나 학부 때 우연히 했던 경험이 사회에선 생각보다 쓸모가 많아서 신기하다. 내가 어릴 적부터 겪어온 괴롭힘과 살면서 '미안해'를 말한 횟수가 오히려 인간 이자연을 잘 설명하는데 말이다. 물론 그걸 쓸 수는 없다. 나도 그들이 알고 싶은 건 인간 이자연이 아닌 것을 안다. 이 말이 진부한 취준생 감성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도. 하지만 나는 너무 사소하고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 인간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이걸 설명해야 해서 오늘 저녁엔 말을 멈출 수 없다.


사람들이 의미 있다고 말하는 사건들은 보통 사회적 성취와 관계가 있다. 대기업 입사나 등단 같은 것들. 하지만 나는 대학 다닐 때 강연을 들으러 다니면서 항상 말 이면에 있는 역사가 궁금했다. 작가가 성당 가서 신부님을 봤을 때 겪은 묘한 경험들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나는 그가 거기 왜 갔을지가 궁금하다. 아마 마음이 좋지 않아서 갔을 것이다. 기도가 필요한 순간이 있었을 테니까. 그러면 아픔은 어디서 찾아온 건지 궁금하다. 그렇게 만들 만큼 상처 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하지만 그런 건 감춰야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강연을 다 듣고 나서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개연성 있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수많은 부조리와 우연이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나의 바보 같음, 이상함, 상처에 대해 쓰는 게 즐겁다. 남들이 체면 때문에, 지위 때문에, 혹은 귀찮아서 시도하지 못하는 부분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없이 솔직한 사람이다. 누가 말하든 이런 얘기는 즐겁고 자연스러우니까 그냥 쓴다.


초등학생 때는 핍박받은 기억이 좀 많다. 그 기억이 인상 깊어서 그것들이 나를 이루는 것 같다. 내가 수학 성적이 더 높다면서 괴롭힌 애도 있었고 성당에서 교리 수업을 받을 때 따돌림도 당했었다. 내가 그래도 될 것 같은 상대였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런 기억이 날 만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타인의 감정에 몰입해있다가 뒤늦게 정신 차리는 멍청한 성인이 됐다.


어른이 돼서 지금까지도 만나는 초등학교 동창은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던 키 작은 여자애다. 어쩌다 보니 살아온 날의 대부분을 함께 한 사람이 됐다. 남자애들한테 괴롭힘당하는 그 애를 지켜주려다가 내가 대신 맞았던 기억이 난다. 어쩌다 그 애를 지켜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모든 게 어쩌다 보니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 애는 지금도 초등학생 때 내가 다른 애랑 노는 게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고 말한다. 그 애는 그런 질투가 나에 대한 기억을 이뤘을 것이다. 사소한 일을 기억하는 게 기뻤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서.


그 애는 내년에 결혼을 한다. 그 일은 그를 이루는 의미 있는 순간이 될 것이다. 결혼 이후로 우리 대화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친구랑 오래 만나게 될 사람이 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이상하다. 그 누구보다 편한 게 너였는데. 너는 육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사람과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하는구나. 나는 아직 피부묘기증도 다 낫지도 않았는데. 결혼을 한다고 그 애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기분이 몹시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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