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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Oct 20. 2020

Wake up

이상한 선생님이 있었고 나는 그 이상함이 좋았다.

 나는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는 않았고, 못 사는 애들 치고는 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일까? 선생들에게 예쁨을 꽤 많이 받았다. 나보다 공부 잘하고 태도도 단정한 애도 많은데 선생들은 늘 애들 앞에서 자연이를 본받으라고 했다. 아마 순하게 생긴 (지금은 자조적으로 사기 잘 당하게 생겼다고 말하는) 얼굴도 그렇게 된 데에 한몫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그들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꽤 잘해줬는데 말이다. 아마 그때의 내가 그런 관심이 그다지 고맙지는 않았나 보다. 오히려 나에게 별 관심 없었던 원어민 선생이 자주 기억에 떠오를 때가 있다. 수업 시간에 nature만 나오면 내 이름을 부르던 그. 그때마다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아저씨가 되면 아재 개그를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만든 사람.



 그가 부임한 첫날, 나는 그를 꽤 솔직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팝송 부르는 시험을 봐야 했는데, 노래를 외우기 위해 영어 선생님이 항상 수업 시작 전에 팝송을 틀어줬다. 우리는 매 수업마다 빔 프로젝터가 쏘는 고딕체의 영어 가사를 보며 서툰 영어 발음으로 팝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우리는 늘 하던 대로 노래를 부르는데 그가 보기엔 우리가 좀 어색했는지, 잠시 지켜보고는 뒤돌아서 스크린 뒤에 숨어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입을 틀어막는 그의 두껍고 흰 손등 위에 갈색 털이 복슬복슬 나있는 게 보였다. 그때 노래가 힐러리 더프의 「wake up」이었을 거다.



 노래가 끝나고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영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의 이름은 와이드너 ……그리고 길고 복잡한 기억하기 어려운 이름이었고 , 미스터 와이드너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제이슨이나 톰 같은 외우기 쉬운 이름을 기대했는데 칠판에 쓰인 복잡한 철자를 보니 그의 이름을 부르기가 왠지 어려울 것만 같았다. 내가 다닌 학교는 전교생이 100명 남짓에 심하게 엇나간 학생들도 거의 없는 학교였는데도 이상하게 원어민 선생이 자주 바뀌곤 했는데, 그는 우리 학교에 가장 오래 있어준 유일한 원어민 선생이었다. 우리 학년은 졸업 때까지 그를 볼 수 있었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앞으로도 배우지 않을  많이 알게  줬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친 해외 각국의 미신이나 장례법 같은 교재의 내용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그가 버스를  때는 이어폰을 빼고 멍을 때려야 한다고 조언한  기억한다.



 음악에 관한 수업을 했을 때였을 거다. 그는 칠판에 deli spice를 적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라고 말하는 듯했다. 클래식도 유행가도 아닌 한국의 1세대 밴드 이름을 적는 그가 신기했다. 우리 세대에 감성적이고 조숙한 성향의 친구들은 보통 넬이나 디어 클라우드를 들었다. 그때 나는 너무 말하고 싶었다. 델리스파이스도 알면서 왜 한국말 못 하는 척하냐고.



 연중행사처럼 일 년에 한 번 정도 델리스파이스의 노래를 찾게 된다. 델리스파이스의 노래를 듣다 보면 와이드너도 생각나고, 제주도 바닷가 마을에서 놀던 친구들도 생각나고, 힐러리 더프도 생각난다. 모든 중학생이 그러하듯이 중학생 때의 나도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지금은 누구나 다 보는 토익 시험을 치러가는 평범한 취준생이 되었다. 이 평범한 삶을 잘 살아보려고 애쓰다가 와이드너를 만나도 어느 정도 대화할 수 있는 영어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와이드너는 나와 친구들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고 그 시선이 공평했다. 아이들의 집안 사정 따윈 상관없이 이국의 작은 마을에서 잡초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을 구경하는 외국인의 얼굴이 나는 좋았다. 그는 나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그것이 나의 가난함과 나이에 맞지 않는 조숙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궁금한 건 아마 중학생들이 음악실에 모여 단소로 아리랑을 연주하는 모습이나 Jayeon이 Nature가 되는 한국어의 이상함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와이드너를 만나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를 만나게 되면 무척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이 복도에서 내가 단소 들고 가는 것을 보고는 연주해달라고 부탁할 때, 내가 그 자리에서 연주해줬던 적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단소를 잘 불어서 참 다행이었다고, 당신이 손뼉 쳐줘서 기분이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델리스파이스 아직도 좋아하냐고, 나는 '달려라 자전거'를 제일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델리스파이스 노래를 이태원에서 들었냐고도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무엇보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팝송부를 때 웃음 참은 거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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