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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Oct 23. 2020

무심한 사람들에 대해

눈물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자주 울지는 않는다. 울게 만드는 일이 잘 없다. 그저께는 그런 일이 있었다. 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많이 울었다. 머리 말리느라 썼던 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며칠 동안 몸이 안 좋았던 터라 코에서 피도 나왔다. 코피와 눈물을 수건으로 닦으면서 울었다. 이렇게 말하니 외국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의 한 장면 같다. 가족들이 깨지 않게 숨죽여서 울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엄마가 들어왔다. 물파스를 못 찾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여기 놔둔 것 같다고. 모기 물려서 가려워 죽겠다고. 나는 당황해서  피가 흐르는 코를 수건으로 틀어막은 채로 '없다, 얼른 나가라'고 했는데 엄마는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왜 그러냐'고 했다.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어찌어찌 물파스를 찾아 건넸다. 엄마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당황해서 잠깐 눈물이 멈췄다. 그러다 잠이 든 것 같다. 


아침에 눈이 부어서 시야가 반쪽으로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작은 대야에 수건을 담고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수건에 피가 묻어있었다고 했다. 나는 코피를 좀 흘렸다고 했다. 엄마는 알았다고 했다. 짧은 대답을 통해 엄마가 나에게 일부러 묻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근데 나의 엄마는 단순한 사람이라 정말 궁금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생각이 없다. 나쁜 의미가 아니다.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엄마라는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한 달 전 쌍문의 집에 들를 때 집에 있는 제티를 훔쳐 갔다. 묻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 가져가서 나조차도 몰랐다. 본가인 제주도에 가서야 알았다. 믹스커피와 함께 통에 꽂혀 있는 걸 보았다. 


서른한 살인 작은 오빠도 우리 집에 들를 때 "어!제티다!"하면서 한 움큼 가져가려고 했는데, 제티는 모든 사람에게 반가운 기호식품인가 보다. 나는 엄마를 통해 제티욕이 60대에게도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가져오는 엄마의 무심함이 대단하다.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은 원래 무심했다. 조금만 몸이 안 좋으면 코피가 났는데, 어릴 적부터 피를 흘린 나를 보며 그들은 하나도 걱정해 주지 않았다. 가족은 온 힘을 다해 무심하려는 인간처럼 그랬다. 조그만 코로 무관심 속에서 부지런히 흘렸을 피를 생각하면 코가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내 손으로 휴지를 끊어서 코를 틀어막았다. 


그들은 그저 내가 몸이 약하다고 했다. 하지만 크고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남들 해마다 걸리는 감기 몸살도 나에겐 없었다.  내 형제들이 극단적으로 건강한 거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덜 건강하다고 세뇌가 된 거였다. 


그래도 살면서 가족의 걱정을 받았던 적이 딱 한 번은 있다. 다섯 살 때였던 것 같다. 카세트 라디오가 보편적으로 쓰였던 시기였다. 방 한구석에 투명한 카세트테이프 케이스가 쌓여있던 걸 나는 기억한다. 작은 오빠가 신나는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춤을 췄다. 나도 춤을 췄다. 팬티 차림의 나는 너무도 신이 났다. 내가 지금 홍대 클럽을 가도 그때의 나처럼 신나게 춤을 출 수 없을 정도로 신이 났다. 그렇게 추다가 그만 넘어져 버렸다. 나는 곧바로 테이프 케이스의 뾰족한 모서리에 머리를 박았다.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그때는 작은 오빠도 어린 나이였을 테니까 많이 놀랐을 것이다. 작은 오빠는 그 자리에서 빽빽 울었다. 그가 어른이 돼서 말하길 내가 머리부터 박아서 저능아가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큰 언니와 큰 오빠도 허겁지겁 달려와 내 상태를 보곤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구급상자에서 솜을 꺼내 내 피를 틀어막았다. 의료용 테이프를 못 찾아서 이마에 스카치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였다. 그게 내가 가족들에게 받았던 처음이자 마지막 걱정이었다.


나는 그 이후론 정말 사고 없이 자랐다. 살면서 깁스 한 번 해본 적 없다. 다행스럽게도 지능도 정상이다. 나는 걱정을 받지 않았다기보다 걱정하게 만들 일을 만들지 않는 유형이었다. 크면서 가족들을 아주아주 걱정하게 만들어야 겉으로 걱정을 해준다는 걸 알게 됐다. 무심한 성격은 무관심이 아니라 소심함에서 비롯된다. 그걸 좀 일찍 알았다. 무심한 사람들은 마음을 자주 숨긴다. 남의 마음을 헤집어 볼 용기가 없어서.  그런 인간들 사이에서 자라서 그런가 나는 오히려 무심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느낄 때가 많다. 누군가는 속내를 밝히지 않아서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그들이 생각이 많고 섬세해서 그렇다는 걸 안다. 코피가 터지고 이마가 찢어져야 마음을 알 수 있는 건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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