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은행을 갔는데, 단정한 아가씨가 있는 거야. 근데 웃을 때 드라큘라처럼 이빨이 그렇더라고."
아빠가 은행에 다녀와서 한 말이다. 그때 나는 9살인가 그랬다. 아빠는 낯선 종족을 본 것처럼 말했다. 그렇구나. 나는 그러고 말았다. 그때까진 몰랐지. 내가 덧니가 생길 줄은.
나는 이빨을 제때 뽑아야 하는 것인 줄도 몰랐다. 그저 흔들리는 이빨이 있으면 빼고 안 빠지면 놔두고 그랬다. 가족들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 윗잇몸에 상처가 생긴 걸 알게 됐다. 나는 평범한 구내염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초등학교에서 양치교육을 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해마다 불소로 입을 헹궈야 했다. 불소는 쇠를 상상하게 하는 맛이었다. 선생님은 일 분동안 입에 머금고 뱉으라고 했다. 화장실로 달려가 세면대에 불소를 뱉는데, 입에서 피가 섞여 빨간 액체가 쏟아졌다. 아이들이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 날부터 잇몸에 이빨이 자라기 시작했다.
엄마는 교정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덧니가 있는 채로 사는 것보다 교정기를 끼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그 이빨이 스물여섯이 될 때까지 남아있다.
덧니를 교정하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누구는 교정만 하면 정말 예쁠 텐데, 아쉽다는 듯이 말한다(그런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얼굴은 아닌데……). 멀쩡한 얼굴에 생긴 흠처럼 생각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성격이나 특성을 얻어가는데 왜 덧니는 교정해야 할 문제처럼 보이는 걸까. 그게 그렇게 잘 보이는 건가?
나도 교정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그냥 특이한 종족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 보면 덧니 족도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텐데. 덧니 있는 게 더 귀여워, 덧니 없는 게 더 단정해, 이런 평가가 무의미해지면 더 좋을 것 같다. 나는 덧니가 있어서 내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나는 낮은 목소리와 스물여섯 번 지나간 봄과 안경을 안 쓰면 간판도 못 읽는 나쁜 시력과 쌍꺼풀이 없는 눈과 섬에서 살아온 십여 년의 시간의 총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