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텔레비전에서 주웠어. 이 부러운 사랑을...
엄마집의 아침은 6시 반부터 시작된다. 요즘 들어 허리와 다리가 더 안 좋아진 엄마를 도와 아침밥 준비를 하고 식사를 다 마치면 7시 40분 정도가 된다. 내가 설거지를 할 동안 엄마는 소파에 앉아 발 마사지기를 돌리면서 TV를 켜신다.
"따라라라 라라 라..."
<인간극장>이 나온다. 어떻게 저렇게 매주 재미있는 소재를 찾냐며 엄마는 볼 때마다 감탄하고, 나는 설거지를 하며 언제나 똑같이 제보도 받고 소재를 찾으려고 작가들이 팔방으로 뛰는 거라고 엄마 쪽을 향해 언제나 똑같이 얘기한다.
“에구 얼마나 고생 많았을까.“
“애들이 저렇게 잘 컸네. ”
“애가 다섯이야. 대단하다. 대단해.”
주인공의 사연에 대한 엄마의 감상이 넘쳐나 거실 안에 너울너울 물결칠 때쯤이면, 주간보호센터에 갈 채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온 아버지가 엄마 옆에 앉는다. 그리고 거의 끝나갈 무렵의 <인간극장>을 함께 보신다.
요즘 내가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의 풍경이다. 아버지가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계셔야 하고 드실 수 있는 음식이 없어 모두 전전긍긍했던 힘든 시기를 무사히 지나온 지금, 특별할 것 없는 어찌 보면 시시하기만 한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할지도 모를 심심한 일상이 오늘 또 똑같이 펼쳐짐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인간극장>을 보는 엄마 아버지를 등 뒤에서 바라볼 때면 나는 두 분이 주인공인 ‘특별판 인간극장’의 시청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이제 한 사람은 귀가 어두워지고 또 한 사람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노부부의 이야기가 내 앞에 있는 것이다.
“나도 저런 장사해 봤는데...”
“시집오니 너희 집이 그렇게 가난했어.”
"너를 기저귀 여섯 장으로 키웠지."
엄마의 옛날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섞여 들고 나는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흥미롭고 재미있게 듣는다. <인간극장>을 보는 아침은 요즘 내게 가장 평온하고 소중한 시간이다.
그런데 안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 힘든 일을 겪고도 서로 위하며 사는 부부나 알콩달콩 귀여운 아이들을 잘 키우는 모습이 나오면 어김없이 엄마의 한탄이 시작된다. 요즘은 그래도 내 눈치를 보시긴 하지만 ‘뭐가 모자라서...’ 하는 혼잣말 소리가 들리면 정말 욱 올라온다.(노처녀 히스테리 부린다는 반격이 날아올 게 뻔해 꾹꾹 참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에도 어떤 부부의 이야기가 나왔다. ‘농부와 모델’이라는 제목이었다. PD가 나이 지긋한 농부에게 물었다.
"아직도 아내 분이 많이 사랑스러우신가 봐요."
주인공인 농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을 했다.
"갈수록 사랑스러워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소행성 612호에 심어 놓은 자기가 가꾸고 돌보던 장미. 그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해가 갈수록 내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고 주고받는 사랑 때문에 갈수록 이 사람이 소중하고 예쁘고 아름답구나,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자식을 다 키우고 둘이 오붓하게 사는 중년의 부부.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저들의 사랑에 나는 완전히 대패했다. 저런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는 인생은 어떤 걸까. 엄마를 슬쩍 쳐다본다. 저렇게 살아봐야지 에고, 하는 엄마의 지청구가 쏟아지겠지 하고 있는데 조용하다. 둘째 외삼촌만 있는 결혼식 사진이 갑자기 떠올랐다. 집안에서 반대했던 결혼을 한 엄마의 사랑을 떠올리고 계신 걸까. 아버지는 텔레비전 속 농부와는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이번엔 아버지 쪽을 슬쩍 쳐다본다. 다정하지 못함을 반성하고 계시려나 표정을 살펴보지만 뭔가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도 같고 뭐 아무 생각 없으신 것도 같다. 두 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이걸로도 충분하다 싶었다. 험난한 산도 폭풍 치는 바다도 넘어 <인간극장>을 함께 보는 여기까지 함께 왔으니 됐다.
<인간극장>이 끝났다. 아버지는 주간보호센터로 출근하시고 엄마는 집안에서 걷기 운동을 시작한다. 이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언제까지나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지금, 매일 반복되는 이 아침 풍경을 두 눈에 꾹꾹 눌러 담아둔다. 두 분이 주인공인 ‘특별판 인간극장’이 감사하게도 아직 여전히 상영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