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희생이고, 희생은 호사

손익 따지는 인간이 맺는 손익을 초월한 관계

by 나울

“사랑해”

“사랑한다”


살면서 꼭 하게 되는 말이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무엇을 한다는 걸까.

나는 그 붕 떠 있는 동사의 의미를 오래 붙잡아 왔다.

사람마다 사랑의 정의는 다를 테지만, 나도 언젠가 사랑을 하는 순간이 올 것이기에 그 정의를 내려야만 했다.


보통 우리는 “좋아해” 다음 단계를 “사랑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좋아함’과 ‘사랑함’의 경계가 늘 헷갈렸다.

좋아한다는 건 언제나 명확했다.

마음이 가고, 계속 눈길이 가고, 호감이 느껴지는 산뜻한 느낌.

그런데 그것이 사랑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좀 오버인데..." 하며 머뭇거렸다.

그래, 사랑이 좋아함보다 더 깊고 진한 감정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라는 것일까…

내가 그 차원에 도달하는 날이 오긴 할까?

내게 사랑은 마치, 함부로 건널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차원인 듯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모르는 차원’인 사랑을 형태로 상상해 봤다.

뭔가 빨갛고, 뜨겁고, 흠집이 나있는 것 같기도 하고, 본래의 모습인지 구분되지 않는 모습.

활활 타오르는 듯 보이지만, 은은한 빛을 뿜고 있는 건가 싶은 묘한 상태.

당최 불타는 건지 빛나는 건지, 뻘건 피 같기도 한 것이 상처인지 생명력인지 알 수 없는 그 모호함사랑에서 느껴졌다.


모든 것이 모호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닿았다.

그러한 모호함까지 나누는 것이 사랑이라면,

내가 너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려나.

그때부터 ‘사랑은 아마 희생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일이 된다.

그리고 희생이 전혀 억울하지 않은 상태일 테다.

오히려 “내가 너를 위해 희생을 하게 되어 참 잘 된 일이다.”라고 인식하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랑은 희생이고 그 희생이 내게 호사일 때 비로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이 나에게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될 때, 그건 더 이상 손익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가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낄 때, 나는 비로소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은 손익을 초월한 이상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절대 동등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식에게 손익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건강만 하길, 잘 살길 바랄 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자식인데, 그 희생이 어떻게 억울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자식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사실만이 큰 기쁨일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은 무적이다.

사랑의 가장 완전한 형태가 바로 그 안에 있었다.


이런 결론에 다다르고 나니,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굉장히 무거워진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나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는 낯선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일과도 같으니까.

그럼에도 인간은 사랑을 택하고, 심지어 법적으로 묶이기 위해 결혼을 한다.

나는 그런 모습에서 깊은 전율을 느낀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느끼는 가장 큰 감동이다.

그건 이성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이성적이면서도 가장 순수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요즘 방송을 보면, 사랑이 붕괴되는 모습을 자극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트렌드인 듯하다.

수많은 프로그램이 이별과 배신을 다루며 높은 시청률과 조회수를 얻고 있다.

물론 도파민, 재미도 좋다. 하지만 나는 내심 그런 흐름이 두렵다.

그들도 한때 “사랑해”를 수도 없이 말했을 텐데, 지금은 서로에게 상처가 되려고 하니 말이다.

사랑이 실패의 서사로만 알려지면, 사람들은 점점 사랑을 불신하고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나조차 내가 믿어온 사랑의 정의를 의심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 있고 내면이 단단한 자만이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혹시 문득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나?”라는 의문이 들 때 이렇게 되물어보자.


“이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이 “그래, 할 수 있어”라면, 머릿속 떠올린 그 사람을 사랑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 순간, “그래도 나만 계속 희생하는 건 좀 억울한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아직 사랑의 초입에 있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억울함 없는 마음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쉴 수 있다.


나도 아직 사랑을 잘 모른다.

아니, 알 것 같다.

근데 다시 모르겠다.

내가 아는 모든 추상 중에서, 사랑은 가장 추상적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사랑의 형태도 계속 바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완벽한 사랑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큰 틀은 잊지 않으려 한다.


사랑은 희생이고, 그 희생이 호사로 느껴질 때,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위대하고 숭고한 사랑을 하는 중이라는 것을.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