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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메달 Apr 25. 2020

집착과 사랑의 관계학

부모 자식 간

손님 오면 쓴다고 냄비나 그릇 선반에 올려두고, 헌 그릇 쓰는 엄마가 도대체 이해가 안 되었다, 어릴 때부터. 1년에 집에 손님이 몇 번 오고.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 집에 도대체 올 손님들이 누구냐고.

그 버전이 연결되어 거실에 책이나 서류들이 늘려 있으면 그걸 위치 이동해 버리는 엄마가 또 이해가 안 된다. 내 책은 내가 정리하니 그냥 좀 두면 좋겠다고 하면, 또 그런 이야기를 한다. 누가 집에 오기라도 하면 흉본다,라고. 도대체 누가 우리 집에 오느냐 말이다.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은 내 지인들 밖에 없다.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이. 그것도 불쑥 오는 손님이 아니라, 나랑 사전 약속하고 오고. 거실에 책이 좀 늘려있다 한들 그들이 욕할까. 또 하면 어쩔 건데.

엄마는 평생을 남을 의식하며 살아온 듯하여 맘이 짠할 때도 있다만, 돌아다보면 평생을 자기 주도로 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도무지 나를 이해를 못 하는 거다. 나는 엄마는 하나도 안 닮았고. 성격이나 등등 거의 모든 것을 아빠 닮았다. 그래서 가끔은 친정엄마가 나한테는 또 다른 답답함이다. 오십 넘은 자식을 아직도 자기의 인형처럼 길들이려 하는 것이 측은하다 못해 슬프다.

어릴 때 학교 갔다 오면 가방 속 필통까지 다 뒤지고, 책상 서랍 열어서 맨날 뭘 들여다보는 엄마랑 어릴 때부터 정말 많이 싸웠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다.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그래서 성장하면서 나는 나 스스로 엄청나게 나를 묶었다. 공감은 하되 타인의 이런저런 것에 훈수 달지 말고, 타인의 무엇 무엇에 관심 가지지 말자고. 그래서 결혼 28년 동안 남편 지갑 열어 본 적 없고, 핸드폰 들여다본 적도 없고. 아이의 것도 초등시절 알림장 정도 보는 것 외에는 함부로 뭘 열어보고 들쳐본 적이 없다.

부모 자식 간이라도 일정 간격의 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거 무너지게 하는 밀어붙임이 너무 낯설고 버거워 꺼이꺼이 눈물을 쏟는다. 사는 것에 대한 버거움이 발끝에서 머리까지 쳐 올라오면 뭘 해야 하는지 대략 난감, 속수무책이니. 여전히 철부지 반증이다.

집착과 사랑의 관계학은 무엇일까. 왜 그리 타인에 대한 집착이 강할까. 그래 자식이 타인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든 자식이든 배우자든 애인이든 그거 다 남이고, 타인이지 자신은 아니지 않은가. 지켜보고 응원은 하되 종속되는 부산물로 생각하지 않아야 관계가 건강해지는 것 아닌가.

커피 한 잔이 정말로 그립다. 브랜드로 따지면 독일의 치보 커피가 정말 그립다. 쇼핑몰에서 파는 그런 커피 말고, 치보 전문점에서 제대로 내려주고, 우려 주는 그런 커피가 그립다. 국내에서는 쉽게 편하게 구해지지 않는 치보 커피(물론 인터넷에서는 판다)가 이런 날, 불쑥 그리운 것은 커피 생산 100년의 역사 안에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하는 뜬금없는 대입이 되면서, 고작 50년 조금 넘게 연을 한 부모 자식 간의 관계적 운명이 서럽고 애달파서 유독 오래된 커피회사가 생각난다.  100년 가려면 얼마나 더 지치고 싸우고 버텨내고, 뛰어넘어야 할까. 집착이 애정 되고, 소멸이 간절함이 되어, 어느 날 문득 이별을 하면 또 아득한 아픔이 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내 안의 자유를 꿈꾼다. 엄마에게서 영혼적 자유를 꿈꾸며 나를 다독이고 있으니, 가슴 아프다.

독일 치보 커피의 역사와 족보를 찾아봐야겠다. 치명적 끌어당김을 하는 그 역사들이 있을 것이다, 는  상상을 하며 엄마에게 치보 커피 한 잔을 권해 보려 한다.

ㅡㅡ

2018.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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