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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메달 Jun 22. 2021

아침 넋두리

문학의 속앓이 그리고 관계


1.

내 인생에 중요하지 않은 것에 시간 투자한 것, 결국은 그거 한 다리 걸쳐서 뭔가 덕 보려던 심산이 아니었을까. 덕질도 결국은 내 안의 허세들이라는 것. 허세의 양극성은 나를 키우기도 하지만 나를 내리게도 하는 것이지.


중요한 것에 몰입하려면 내가 나를 뛰어넘어야 하고, 내가 나를 조금 더 객관화해야 해. 그럼에도 돌아다보면 인생은 언제나 처음 시작의 단추라는 것이지. 그 단추의 엇박자를 언제 아느냐에 따라서 자의식이 제대로 정착을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차이라는 것.


이래저래 답답한 아침을 맞이하고. 어느 페친이 페삭 당한(?) 변의 마지막 한 줄. 여러 생각을 하게 하네. "나는 페삭하면서 나를 통해서 아는 사람들과는 연결되는 것은 뭐냐고" 뭐 이런 비슷 문장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공감되더라고.


나는 관계에서 그런 것을 되게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라, 누구 소개나 걸쳐 걸쳐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은 언제나 내 인맥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각별히 조심하는 편. 혹이나 처음 소개한 사람이나 아는 사람에게 누가 될까 하여, 어쩌다 다른 일로 만나게 되면 미리, 혹은 그 뒤에 그 만남을 꼭 보고 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어. 물론 그런 보고를 뛰어넘는 친밀함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원래 내 사람이 서운하지 않게 많이 챙기는 편인데 예외도 있기는 하지. 그들 둘이 아주 각별한 관계가 원래 아니었으면 패스도 하지만 그들이 좀 각별히 친하다 하면 꼭 사전이나 사후 보고 해. 왜냐하면 서로 각별하면 꼭 내 지인이 나한테 이야기하거든. "어 며칠 전에 누구 봤어. 뭐뭐 때문에 봤어"라고. 대부분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내가 사전이나 사후에 이야기 먼저 하려고 애쓰지.


사는 것의 물음표에 뭐가 중요한지 또, 잘 모르겠어. 요즘 많이 느끼는 것은 내가 그리 총명하게 살지는 않았다는 것이야. 그게 아주 큰 회한으로 온다기보다는 그냥 흐느적거리는 늪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 원초적 고독과 피로감이 몰려오는 그 한계에 결국 내가 못 하는 것은 또 원초적 구토라는 것.


스무 살로 돌아가면 나는 한국에 있지 않았을 거야. 프랑스는 내 흥의 결로 맞았을 것 같고, 독일은 건조하고 냉랭한 개인주의적 분위기가 맞았을 것 같아. 20대 초반에 어학 상관없이 외국 나가서 맨땅에 헤딩한 여인들이 부러워. 지금까지 거기 외국에서 살고 있는 그이들이 너무 부러워.


여하튼 페친의 짧은 글에 오만 우주를 다 담아서 넋두리하네.




2. 아침 시간 넋두리하는 김에 하나 .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를 위대하게 생각하는 것은 원초적 '구토'를 너무 세련되게 한다는 것이지. 그거 할 줄 알아야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는 것이거든. 어릴 때 글쟁이 선배나 어른들이 그랬어. 너는 시, 는 못 쓴다. 소설도 못 쓴다. 나도 알고 있어.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는 현실에서 오롯하게 끄집어낼 수 있는 자기 자아가 탄탄해야 문학을 하는 것이거든. 그 경계 안에서 감정을 압축하면 시인이 되고, 묘사하여 풀어내면 소설가가 되는 것이지.


문단에서도 꽤 알만한 선배가 있는데, 그이도 어릴 때부터 나는 시인도, 소설가도 안 될 것이다 생각했어. 글은 잘 쓰고, 사유의 벽도 깊고 높아. 그런데 왜 시인도 소설가도 안 될 것이다 생각했냐 하면, 글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이 보이는 그 지점을 극도로 막고 있는데 어떻게 창작을 할 수 있겠어. 내 사랑의 한 축이 보이고, 내 일상의 한 축을 촉촉하게 보여줘야 하는 그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거 못 넘는다고 생각했거든. 역시나 글쟁이로 평생을 살아가는 업을 하고 있지만, 시인이나 소설가는 안 했지. 문학이 그런 것이지.


시인이나 소설가의 위대함에 눌려서 어느 날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고 있으면 내 자의식이 다시 가위에 더 눌려져. 도대체 하고 싶은 것이 뭐냐. 영악하지도 못 하고, 부지런하지도 못 한, 내 안의 자아는 도대체 어디까지 와서 헤매고 서성이고 있냐고 물어. 그 질문에 대답을 못 해서 이 책도 읽고, 저 책도 읽지만 도무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조금 더 영악해지면 좋겠어. 조금 더 부지런해지면 좋겠어. 조금 더 미쳤으면 좋겠어.


시인들의 글과, 소설가들이 묘사하는 그 디테일들의 글이 아프게 해. 창작의 아우라가 있거나 실용의 현실감이 있거나 뭐든 있으면 좋겠어. 그런데 죽어도 못 할 것 같아. 뛰어넘는 한계가 언제나

몇 센티는 바닥에 깔아 두는 것의 습관이 있거든. 그렇게 바닥에 깔아 둔 그것들이 부메랑 되어 돌아오는 것이거든. 차라리 영악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게 요즘 소망이야. 치열하지 말고, 영악해지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스스로 세뇌하고 있어. 내 안의 영악성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시인이 못 되어서, 소설가가 못 되어서, 그 능력이 안 되는 그 틈에는 결국 단순하지 않은 오만 땅덩어리를 끌어안고 산다는 것이지.


시인을, 소설가를 위대하게 생각하는 것 좋잖아. 그대신 나는 제발 좀 단순해지자. 그게 내 숙제야.


가을까지 아플 것 같아.

20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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