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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 30년산 우정, 고마워 홍홍홍

습작의 창고

by 나바드

내 기억 속에서 이 녀석과 나는 언제나 함께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발렌타인 30년산이 다 되어간다. 내 삶을 이야기할 때 이 친구를 빼놓고는 형용할 방법이 없다. 기억이라는 것을 시작할 때부터 아팠는데, 내 기억 속에는 늘 이 친구가 있었다. 신은 실수를 했다. 내가 아팠던건 신이 고의적으로 저지른 실수일 거다. 하지만 내 곁에 이 친구를 두게 한 건, 신이 의도치 않게 저지른실수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존재하고, 앞으로도 이 친구 덕분에 버텨보려고 한다.


-90프로 손절, 천만원 넘는 금액이 사라짐.


모자이크 하나는 신발끈을 묶었다는 표현의 자음이고,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니까 모자이크했습니다.


조롱도 롱이라면, 난 롱 포지션으로 맞고 있다

투자라는 건, 원래 기승전결이 있는 법이다.

기(起): 희망을 품고 진입하고,

승(承): 기대감에 차서 차트를 보며 설레고,

전(轉): 예상과 다르게 흐름이 흘러가며 속이 쓰리고,

결(結): 한 방에 손절.


그리고 그 순간, 친구의 조롱이 이어진다.

"이걸 한 방에 날렸다고? 직장인들 월급 1년은 모아야 그 돈이야ㅋㅋㅋ"

아니, 이게 위로냐 조롱이냐.
그래도 생각해보면 직장인들이 1년 동안 모아야 할 돈을 나는 몇 분 만에 털어버리는 미친 능력을 가진 거 아닌가? 하, 이게 웃프다.


친구라는 이름의 헤지펀드

이 친구는 나의 경제 상황을 두고 마치 헤지펀드 매니저처럼 반응한다.
돈을 벌면 "야, 주식 천재네?"
돈을 잃으면 "이걸 한 방에 날려? ㅋㅋ 직장인들 1년은 모아야 돼." 내 인생의 재무제표를 이토록 신경 써주는 친구가 있을까? 문제는 수익이 났을 때 칭찬은 10초도 안 가고, 손실이 났을 때 조롱은 평생 간다는거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렇게 조롱당하고 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 친구의 조롱 덕분에, 이 돈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래도 버텼다.


우정도 롱 포지션

이 친구와 나는 발렌타인 30년산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오래될수록 깊어지는 우정이지만, 우리는여전히 싸운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돈을 잃으면, 친구는 박장대소한다. 요즘 친구가 연애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좀 불안하다.
결혼한다고 할까 봐.

평생 내 옆에서 내 손절을 조롱해줄 줄 알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에게 집중해서 사랑을 준다고?
이거 뭐 주식 시장보다 더 예측 불가한 상황이다.

그래도 진심으로 응원한다.
아니, 진심일 뻔했다.
그냥 "얼른 나에게 돌아와."


우리는 오래된 부부보다 더 오래 알고도, 여전히 싸운다

우리는 오래된 중년 부부보다 더 오래 알고 지냈다.
그런데도 아직도 싸운다. 늘 싸운다.
그런데 정작 왜 싸웠는지는 모른다.

싸우고, 화내고, 삐치고,
그러다가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다시 웃는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전생에 내 배우자였던 건 아닐까?


이 친구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나는 종종 생각한다.
이 친구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삶을 버틸 수 있을까? 견딜 수 있을까?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걸 보면서,
문득 나도 친구를 따라 가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친구가 있다.
"요즘 잠은 좀 자냐?"
"밥은 좀 먹냐?"
"몸은 괜찮냐?"
"무슨 일 없냐?"
"안 피곤하냐?"

이 친구는 언제나 내게 가장 세심하게 물어봐 준다.


그런데 나는 한 번이라도 제대로 답해준 적이 있을까? 나는 이 친구한테 받기만 했다. 나는 친구에게 해 준 게 없다. 평소에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쑥스러워 잘 못한다.

하지만,
늘 고맙다.
늘 미안하다.
그리고, 늘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도 내가 한 방에 날리면,
또 조롱해줘.
그 조롱 덕분에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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