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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이유

습작의 창고

by 나바드

글을 쓰는 이유


‘누군가’ 때문에, 아니

‘누군가’ 덕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투병 생활을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만약 내가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이 아니라, 본능만 가진 동물로 태어났다면 아마 벌써 어느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독한 약과 고약한 항암치료로 인해 왜소했던 체격,

학교보다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 더딘 지식,

그로 인해 언제나 위태로웠던 시간들. 그리고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남들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해, 나는 ‘척’을 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어떤 대화에서도 할 말이 있어야 했고, 적어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지적 허영심’으로 책을 읽었다.


해외에 나갈 때도 책이 가득 든 캐리어를 끌고 간다.

그래서 종종 위탁수하물 초과 요금을 내지만, 책을 챙기는 것이 내게 주는 안정감의 가치가 그보다 훨씬 크다.

호치민에 머무는 동안 읽었던 책


매년 병원에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더딘 속도로 들어가는 약물, 구토와 두통, 알레르기와 온갖 부작용들. 하지만 28년 차 ‘경력직 환자’에게 그런 것쯤은 별거 아닌 척 참아낸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책을 읽는다.


그 모습을 본 간호사나 의사가 묻곤 한다.

“출판사 직원이세요?”

“글 쓰는 사람이세요?”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한다.

“아니요, 그냥 읽어요.”

항암치료 받을때 읽었던 책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서툴고, 예민한 성향이라 스트레스도 잘 받는다. 좋아하는 것도 많지 않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지 모른다. 뭘 하면 내가 편해지는지, 아직도 찾는 중이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

술은 체질적으로 받지 않고,

담배는 냄새가 좋다면 태울 수도 있겠지만,

불행히도 냄새가 싫어 손에 쥘 일도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다.


“글을 써봐요. 너는 생각보다 글을 잘 쓰고, 다방면으로 아는 게 많아 조화로운 글을 쓸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시작했다. 그 ‘누군가’는 브런치를 추천했다.

여기엔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고, 브런치 작가가 되는 과정에서 오는 묘한 뿌듯함이 있다고.


그래서 2월 초, 그냥 글을 하나 적어 올렸다. 며칠 후, 브런치에서 답장이 왔다. “당신의 글을 연재하세요.” 2월 7일, 처음으로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나는 원래 한 입 베어 먹은 사과폰의 오랜 유저다.

메모장엔 수많은 낙서장이 있다. 그것들을 뒤져가며 글을 쓴다.


그리고 2월 26일, 네이버 웹소설에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익명으로. 그날 이후, 수백 편의 소설을 썼다. 오늘 연락이 왔다. 조회수 3만 회 돌파, 리그 변경, 그리고 혜택 안내.

네이버웹소설


나는 SNS도 하지 않지만, 3일 전에 인스타그램을 개설해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인스타


작년 연말부터 개인적인 사정으로 거의 집에만 있었다. 내향적인 성향인데도 점점 활력이 떨어지고,

우울감이 깊어졌다.


그런데 2월 26일부터 하루에 40~50편의 글을 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뱉어냈다 “. 솔직히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친구가 말했다.

“적당히 좀 해. 그러다 쓰러져.”

“뭘 그렇게 병적으로 써대?”


나도 모르겠다.

그냥 지칠 때까지 한 번 써보려고 한다.


오늘, 네이버에서 연락이 왔다.

영양가 없는 글의 조회수가 3만을 넘겼다고.

그리고,

어느 슬로건 공모전에 응모한 것이 수상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건 절대적 영양과잉 시대가 불러온 참사다.

나 같은 애송이가 이런 걸 느껴도 되는 걸까.

영양가 없는,

내가 쓴 영양가 없는 글이 주목받는 시대가

이렇게 쉽게 도래해도 되는 걸까.


그리고 문득,

나에게 글을 쓰라고 했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참 많이 미안했다. 나의 개인적인 이유로 상처받았을 그 마음에 신경이 쓰였다.


그 ‘누군가’가 나에게 건넸던 블랙윙 연필.

오늘도 나는 그 연필로 습작을,

습작을,

‘습작습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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