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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폐허에 대하여

습작의 창고

by 나바드

나라는 폐허에 대하여


삶은 서서히 붕괴되어 왔다. 누군가는 그것을 회복이라 말하겠지만, 나는 안다. 이것은 복구할 수 없는 균열이며, 파괴의 문장이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살아 있었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는 진부한 말조차 이제는 비켜 간다. 그것은 고통이라는 개념으로 형상화될 수 없는 것 시간의 침식이다. 시간은 나를 먹었고, 나는 나를 씹어 삼켰다.


10년. 우울증, 불면증, 부정맥, 신경증. 병명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저 표식이었다. 나라는 인간이 이 사회라는 무대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를증명하는 진단명이었다.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묻는다. 그 말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살아 있는 나는 사회가 원하는 존재였을까, 아니면 그저 숫자에 불과했을까.


파멸은 때로 해방처럼 보인다. 누구도 바라지 않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존재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 나는 그것을 수면제 다섯 알과 함께 천천히 상상한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방식으로 사라지는것. 그것은 고요한 축복일지도 모른다.


사카구치 안고는 인간의 타락을 문학의 중심으로 끌어냈다. 나의 삶도 그 타락의 한 문장이었다. 누군가에겐 무의미하고 불쾌한 문장이었겠지만, 나는 그 불쾌 속에서 비로소 나였다.


나는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받지 않았다. 믿지 않았고, 믿지 못했다. 감정의 모든 연결은 의심으로 해체되었고, 그 의심은 나를 끝없이 잠식했다. 나는 나를 파괴하면서 존재해왔고, 그 파괴의 연장선에서 지금이 글을 쓰고 있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오해하지 말아달라. 이것은 구조요청이 아니다. 나는 이미 구해질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해 있다. 지금 남은 건 단 하나, 정리되지않은 감정의 찌꺼기들.


마지막으로 나는 내게 묻는다. 이 삶에 한 줄의 의미라도 남겼는가. 아니,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나다. 의미 없는 존재. 사회라는 톱니에서 튕겨나간 조각.


이제 그 조각은 흩어진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잔해조차 없이.


사카구치 안고라면 웃었을 것이다. 인간이여, 그렇게도 고결한 죽음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더럽게 끝나라. 나는 그 말에 순응한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누추하게, 무겁게, 아무 의미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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