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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가 지금의 나였다면

습작의 창고

by 나바드

기형도가 지금의 나였다면


무드등을 켠다. 불빛은 약하고, 그림자는 길다. 나의 그림자는 이제 내 몸을 삼키려 한다. 나는 침대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이미 낭떠러지 끝에 걸려 있다. 손끝이 떨리고, 이마는 차갑다. 오늘 밤도 또 그렇게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아니, 무사히 지나가야 하는 이유가 남아 있긴 한 걸까.


나는 매일 약을 먹는다. 수면제 다섯 알, 우울증 약, 신경안정제, 불안진정제. 이 약들이 내 삶을 버티게 해줄 마지막 지푸라기라면, 나는 얼마나 오래 이 지푸라기를 움켜쥐고 있어야 하는 걸까. 버티는 것만이 나의 존재 이유처럼 되어버린 시간. 누가 나에게, 그래도 살아 있지 않느냐고 말할 때마다 나는 점점 더 죽은 사람이 되어간다.


10년이다. 우울증과 불면증, 부정맥과 신경증. 10년이 지나도록 나는 낫지 않았다. 아니, 낫는다는 개념조차 잊었다. 이건 병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나는 아픈 사람이고,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아니, 살아가야 할까? 그게 진짜 나를 위한 일이긴 할까?


기형도 시인이 지금 나였다면, 그는 어떤 시를 썼을까. 아마도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어둠은 천천히 나를 덮고,

내가 잊고자 했던 이름들은 다시 내 귀에 속삭인다.

그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나는 아무에게도 답하지 않는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누군가의 실수라면,

나는 오늘 밤 그 실수를 지우기로 했다.”


기형도의 시처럼, 나도 말하고 싶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아 있었다고. 너무 오래, 나를 견디며, 나를 죽이며 살아왔다고. 그림자 속에서 웃는 흉내를 내고, 사람들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누구도 모르게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고.


이 밤이 지나고 내일이 온다 해도, 나는 그 내일을 맞이할 자신이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만이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세상은 변하지 않고, 나는 더 이상 지치지도 않는다. 이미 다 써버렸으니까. 감정도, 눈물도, 기도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면, 그 또한 받아들이겠다. 어차피 이 삶은 나에게 너무 과분했으니까. 이별을 고할 대상도, 아쉬움을 품을 관계도 없다. 누군가 내 부재를 눈치채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또한 내 몫이다.


기형도라면, 아마 내 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로 떠났다. 나는 아직 그 시도 쓰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그 문장 끝에서 나도 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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