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의 창고
살아 있다는 건, 증오로 숨을 쉬는 일이다
― 송몽규 시인의 언어로 나를 말하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건 나를 둘러싼 세상의 말이 아니라,
내가 내게 수없이 반복해 온 하나의 선언이었다.
다섯 살.
몸은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자가면역이라는 이름의 형벌을 받았고, 병상 위에서 나는 인간의 몸이 어떻게 천천히 파괴되는지를 너무 이른 나이에, 너무 자세히, 알아버렸다.
사람들은 그것을 병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것을 ‘내 안의 반역자’라 불렀다.
내 혈관은 나를 적으로 삼았고,
면역은 방패가 아닌 칼이 되었다.
삶의 시작이 이미 고통이었다.
나는 생의 첫 문장부터 처형장이었고,
그 위에 아무런 문장부호도 없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피와 약물과 수액의 반복이었다.
살기 위해 버텼고,
버티기 위해 글을 썼다.
그러나 누구도 묻지 않았다.
네가 왜 쓰는지, 네가 얼마나 아픈지,
네가 누구인지.
나는 언제나 불청객이었다.
몸에 붙은 환자팔찌보다 더 무거운 ‘이질감’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세상의 자격을 구걸하며 살아야 했다.
내가 말하면, 그들은 예민하다고 했다.
내가 울면, 그들은 나약하다고 했다.
내가 죽고 싶다고 말하면,
그들은 참 이기적이라고 했다.
나는 말이 없어진다.
내 말이 곧잘 고통이 되고, 고통이 침묵이 되어
결국 나만 남는 절벽 같은 시간.
그러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송몽규라면, 지금 나를 어떻게 부를까.
그는 어쩌면 말할 것이다.
“생존은 투항이 아니다.
너는 아직 붓을 들고 있잖아.”
하지만,
붓으로 칼을 이길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환자도 투항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다. 나는 병과 싸우면서도, 병원 밖에선 세상과 싸워야 한다.
약은 내 몸을 괴롭혔고,
세상은 내 정신을 짓밟았다.
나는 어느 전선에도 설 자리가 없었다.
나에게 남은 건,
부서진 간, 마모된 신장, 흔들리는 심장,
그리고 매일 밤 마시는 수면제 다섯 알과
아직 쓰지 못한 글 몇 문장이다.
나는 누구를 위해 살아야 했을까.
조국도 없었고, 혁명도 없었고,
단지 아픔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글을 썼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기록하기 위해서.
내 삶은 내 것이 아니었다.
항상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도망자의 기록,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운 문장 하나.
송몽규는 죽기 직전까지 ‘왜 쓰는가’를 물었지만,
나는 지금 ‘왜 살아야 하나’를 묻는다.
그는 죽으며 말했을 것이다.
“나는 저항했고, 그래서 죽는다.”
나는 살아 있으며, 매일 절망하고 있다.
죽지 않아서 남겨진 이 삶은
어쩌면 더 잔인한 형벌이다.
그러니 이 글이 유서가 아니라 고백이기를,
이 문장이 절규가 아니라 증언이기를 바랄 뿐이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나의 내일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내일이 나에게 꼭 와야 하는 이유는,
아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