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밤, 그리고 이야기
늦은 밤, 계동리는 여느 때처럼 은은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밤공기가 한층 차가워졌지만, 가게 안은 여전히 온기가 가득했다. 문이 살짝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났어요."
서울대학교병원의 응급의학과 의사 김봉준이 마스크를 턱까지 내리고 들어서며 말했다. 뒤따라온 마취과 의사 임수정과 병동 간호사 유진수도 익숙한 듯 자리를 잡았다.
"오늘따라 환자가 많지 않았나 보네요." 주인장이 잔을 닦으며 말했다.
"그럼요. 이럴 때 한잔해야죠." 임수정이 웃으며 맥주를 주문했다.
의료진들이 가벼운 안부를 나누며 술을 마시기 시작할 무렵,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H건설사의 건축구조설계팀 팀장 오경식과 팀원 최준혁, 최소진이 들어왔다.
"사장님, 오늘도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경식이 농담처럼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얼마나 야근하셨길래요?" 주인장이 물었다.
"뭐, 12시간 정도?" 준혁이 한숨을 쉬었다. "근데 문제는 일이 끝난 게 아니라는 거죠."
소진이 맥주를 들며 말했다. "내일도 전쟁이죠. 그래도 지금만큼은 일 생각 안 할 겁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병원 의료진과 건설사 직원들이 서로의 고충을 나누고, 때로는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한 여성이 조용히 가게로 들어섰다. P사 철강회사에서 퇴사 후 자신만의 가구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창업한 임수정이었다. 그녀는 계동리의 한 구석에 앉아 와인 한 잔을 시키며 노트북을 펼쳤다.
"오늘도 스케치 작업인가요?" 주인장이 물었다.
"네,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그려둬야죠." 수정은 잔을 가볍게 기울이며 대답했다. "사실 오늘은 다큐멘터리 하나를 봤는데, 주제랑 맞물려서 생각할 게 많아졌어요."
"역시 독립영화 좋아하시죠?"
"그럼요.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어떻게 담아내는지가 항상 흥미로워요."
이야기가 깊어질 무렵, 문이 또 한 번 열렸다. 이번엔 익숙한 얼굴이었다. 방송국 PD 이희재가 피곤한 얼굴로 들어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오늘은 뭐 드릴까요?" 주인장이 물었다.
"소주요. 진하게."
이희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크서클이 더 짙어진 그의 얼굴은 이미 많은 걸 말해주고 있었다. 주인장은 말없이 소주 한 병과 잔을 내밀었다.
"역시 계동리는 좋은 곳이에요." 이희재가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사장님, 저번에 했던 이야기 기억하세요? 계동리에 오는 사람들 이야기, 다큐멘터리로 만들자는 거요."
주인장은 조용히 잔을 닦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어렴풋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계동리의 밤은 여전히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