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어제 저녁식사를 하지 않고 잠을 잔 것이 숙면에 도움이 된 것 같다. 배를 비워야 잠도 잘 잔다. 눈을 뜨자마자 몸 상태와 기분을 살폈다. 다 괜찮았다. 오늘은 부모님을 뵈러 가야 하는 날이라서 기분을 높게 끌어올려야 했다. 그래서 기분을 가장 좋게 만드는 게임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고 있으니 쾌감이 밀려왔다. 봄바람에 새싹이 흔들리듯 잔잔한 쾌감이 이어지자 가슴 깊은 곳에서 기쁨과 환희가 느껴졌다. 단순히 좋은 느낌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희열이다. 가슴에서 환한 빛이 켜지면 이런 기분일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게 생각되고 무언가와 연결된 것 같은 느낌,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뜨거운 울림이었다.
그 순간, 명상문을 암송하면서 오늘이 가장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은 느낌을 마음속에 각인시켰다. 나에게 천국 같은 하루를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뵙는 게 고통스럽고, 직장생활 등 많은 것들이 불안하지만 새로운 태양이 뜬 오늘은 기분이 가장 좋은 날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느낌과 믿음 속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과연 오늘은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아파트 문을 여니 늘 배달되던 신문이 아닌 엉뚱한 신문이 놓여 있었다. 매일 보는 신문의 토요일판에는 소소한 읽을거리가 많아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당황스러웠다. 신문사에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냥 배달된 신문을 보기로 했다. 고향집으로 출발하기 전, 아버지가 드시는 약을 타야 해서 병원에 잠시 들렸다. 약을 받아 들고 병원 주차장에 내려가니 무인정산기가 고장이 났는지 출차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서로 빨리 나가려고 끼어들고 언성을 높이는데 짜증이 치솟았다. 오늘은 천국 같은 하루이니 감정을 진정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순서를 기다린 끝에 차를 빼서 고향집으로 향했다.
고향집에 도착해 문을 열기 전, 다시 한번 천국과도 같은 좋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 후 문을 열고 부모님을 뵈었다. 부모님은 비교적 건강하게 계셨다. 챙겨 온 약 등을 내려놓고 한의원에 모시고 가려는데, 아버지가 일어서시다가 다리에 힘이 풀리셨는지 옆으로 넘어지셨다. 대처를 빨리 해서 다행히 다치시지는 않으셨지만 부상을 입으실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팔순을 넘기신 부모님을 뵙는 것은 때론 슬픔이다. 아버지는 귀가 더 안 들리시는지 큰 목소리로 대화를 해야 했고, 걸음걸이도 전보 다 느려지셨다. 어머니도 목소리에 힘이 없으셨다. 그럴수록 기분 좋은 표정과 감정으로 부모님을 대했다. 한의원과 마트 등을 들린 후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어죽 국수를 사드렸다.
부모님과 함께 하면서도 천국에 와 있는 듯한 좋은 기분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슬픔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기분 좋은 감정을 의식적으로 깨웠다. 그래서였을까? 한의원에서는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장날이라서 열린 좌판에서는 제철 부사를 엄청 싸게 살 수 있었다. 어죽 국수를 먹으러 간 식당에서는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났고, 큰누나가 부모님 집을 방문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페 공사를 하고 있는 윗집 형님이 부모님 집의 창고와 금이 간 사랑방을 깔끔하게 수리해주셨고, 부모님과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린 유기농 매장에서는 우리밀 찐방을 반값에 구매할 수 있었다.
우리 삶은 슬픔과 분노와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아픈 감정을 느끼면서도 틈틈이 좋은 기분을 느끼고, 영감에 따라 행동할 때 삶은 천국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고단한 일상이 온전한 삶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까? 부모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슬픔을 이제는 기쁨으로 맞아야겠다. 매일 나에게 천국 같은 하루를 선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