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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Nov 30. 2015

읽히고 사라지지 않기 위하여.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까.

잠시나마 "무엇을 써야 하나"에 대하여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와 고민하게 되었다. 사실, 지금도 그 고민의 연장선에 서 있는 느낌이다. '작가의 서랍'에는 여러 글이 아직 글도 아닌 모양으로 널지 못한 빨래처럼 널브러져 있다. 발행을 할 수도 없고, 발행하지 않을 수도 없는 우유부단함으로 여태껏 시간만 축내며 숨죽이고 있다.


내가 써놓은 글과 내가 했던 말이,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대화가 모두 공기 속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수없이 많은 것들을 소비하고 그것을 내재하며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존재로 인하여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은 누군가에게나 강력한 욕망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고전"이 사라지지 않듯, 누군가의 노래가 잊히지 않듯, 내가 언젠가의 당신의 눈빛을 잊지 않듯,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 것에 대한 욕망은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무엇을 써야 하나.'라는 고민은 길고 긴 시간을 돌아서도 도돌이표처럼 다시 시작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리하여 글과 관련하여서는 시간의 흐름도 없다, 앞을 다투지 않는 강물처럼 글과 관련한 고민은 시간도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선형적인 발전과정이나 구조가 없다. 머리가 아프다.


읽히기 위해 써야 하는가.
쉬운 단어와, 간결한 문장과,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공감을 구해야 하는가.
혹은 누군가에게 '정보'를 제시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정보'와 '미사여구'로 글을 쓴다. 실로 구미에 당긴다. 읽다 보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문장력에 감탄하는 경우도 있고, 삶의 여러 부분을 예리하게 꼬집어 쓴 비유는 실로 훔쳐오고 싶을 정도로 질투가 나는 경우도 있다. 말 그대로 아름답다. 그리고 어떤 분야의 글은 삶의 도구로 '쓰임'이 있다. 그래서 '라이킷'도 눌러본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다. 잘 읽히려면 가벼워야 한다고 했다.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칫하면 그걸로 끝이다. 아무튼 그렇게 끝이라는 것은 '소비'되었다는 뜻이다. 때로 내가 써놓은 글을 내가 읽다 소름이 돋는다, 글의 가벼움에 용서가 안 되는 순간도 있다. 도대체 내가 쓴 것은 글인가, 배설인가.


수많은 정보가 세상을 휩싸고 있는 요즈음에 다시 '사고'와 '문학'과 '고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지는 발상일까. 15년 후에는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 불가능한 시대가 올 거라는 이 어마어마한 세상에서 인간적 사고, 문학, 고전 이따위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소용없는 것일까. 게다가 인터넷 혹은 모바일을 통해 읽히고 발행될 글에서 뭐 대단한 일을 해보겠다고 문학이니, 고전이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일까. 우리는 프로작가가 아니므로, 가볍게 쓰면 되는가. 그냥 감각적이고 실용적이고 사사로이 공감할 수만 있는 글을 쓰면 되는가.


다들 바쁜데. 다들 정신없는데. 다들 세상에 찌들어 있는데. 이런 말로 조금더 깊어져야 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클래식 음악에 대해 제법 수준 있는 교양을 내놓는 기자 문학수 씨는 클래식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클래식 음악을 쉽게 들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지름길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시간을 내어 음악만을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라는 그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읽고, 생각하려는 사람에게 정보가 가득한 실용적인 글(?!)을 읽는 것 만큼 비실용적인 방법은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졌다. '사고'를 갖고 싶다며 고전을 축약해놓은 책을 읽는 건 너무 얄팍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고의 깊이에 닿고 싶으면서도 '효용'을 이야기하는 습관은 삶의 모든 부분을 자본주의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무겁지 않은 것'보다 '가볍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트렌디하다.
읽고 사라져버리는 글이 너무 많다.


미사여구가 없어도 좋다, 실용적이지 않아도 좋다, 심지어 아무것도 없어도 좋다,

나는 누군가의 치열한 사고의 과정에서 쉼 없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쓴 글을 읽고 싶어 졌다.

또 어떤 시인처럼, 어떤 소설가처럼, 그렇게 이유있는 글을 온 몸으로 쓰고 싶어졌다. 그렇게 욕심을 내고나니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였을 뿐인지 알게 되었고, 어느 순간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좌절이 밀려왔다.

모바일에서, 노트북에서, 그런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불가능할까.



오늘의 이 글은 아마도 계속 나를 겨누는 칼이 되어있을 것 같다. 언제나 나의 글이  비판받을 것이며, 또한  비판받기를 원하며 그러나 언제나 그 비판에 눈물과 화를 물었다가 또 뱉어낼 것이다. 또한 이 글로 인해 언제나 나의 글에 만족할 수 없어 신음하게 될 것 같다.

그러나 다만, 그 칼의 매서움으로 어느 순간 한 번이라도 단 한걸음이라도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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