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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Sep 04. 2015

사랑과 혁명에 관한 짧은 생각

나는 사랑도, 혁명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은 언제나 부조리로 가득하다'는 생각을 그렇게 일찍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부조리와 관련하여 아직도 내가 잊지 못하는 사건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의 저녁 급식을 외부업체에서 단체주문으로 신청을 해서 먹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의 생각으로 나는 금액에 비해 너무도 저질의 음식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급식에 저항(?!)하며 급식신청서에 내가 쓴 한 문장 때문에 나는 담임선생에게 무지막지하게 맞았다. 그 문장은 "우리는(혹은 나는) 개가 아닙니다."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저 문장은 '어른'으로서 혹은 '담임교사'로서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인 것은 분명했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듣기에도 사실 '욱'하는 문장은 맞다. 약간은 장난으로 약간은 아무 생각 없이 쓴 이 문장으로 인해 여하튼 태어나 한 번도 그렇게 심하게 맞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맞았다. 특히나 여고생으로서. 맞아서 아팠다는 것보다, 그렇게 맞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충격이어서(묶고 있었던 머리칼이 헝클어졌고, 맞다가 튕겨나가 넘어졌다.) 그날 모든 수업시간에 하루 종일 엎드려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수업을 들어왔던 어느 선생도 나에게 "괜찮으냐? 왜 그러느냐?"는 말을 건넨 사람도 없었음을 기억한다. 그 이후 나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배웠고, 말이라고 다 뱉을 수 없다는 굴종을 몸으로 익혀야 했다. 그리고 소위 "여고시절"의 꽃다움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아니 "학교"라는 공간에 대해서도 포기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내 기억으로 학교는 공장 같았다, 학생들을 찍어내는 공장. 자습시간에 모두가 책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똑같은 옷(교복)을 입은 녀석들이 동시에 머리를 들던, 그 숨 막히는 공간에 대한 어떤 장면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나는 그리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닌 채로 살았다. 철저하게 조용히 살았고, 친구관계도 그리 넓지 않았다. 사실 어떤 면에서 그것이 이 공간을 버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도 나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대입 원서를 쓸 때에도 정확하게 1-2분 정도의 상담시간만 내게 할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나는 이제야 사춘기를 시작했던 것 같다.


반항하지 못했던 거대한 숲에서 탈출하기라도 한 듯 신나게 내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부조리로 가득 찬 학교에서 벗어나 진정 부조리가 무엇인지도 알고 싶었고 그에 저항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반항이 불가했던 고등학교에서는 철저히 나를 숨기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이 용인되는 대학이라는 공간에서는 폭주했다. 그야말로 저항하는 일이 삶의 목표가 된 양. 이런 자기 기만을 나는 깨닫지도 못했다. "혁명"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매력 있었다. 뾰족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혁명을 이야기하는 선배,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 걱정 혼자 다 하는 듯한 똥폼으로 시간들을 보냈다. 딴엔 순수했다(라고 믿었다), 그리고 무식했으며 나약했다. '안전한' 혁명만을 생각했으면서도 모든 것을 희생하는 듯 굴었다. 그런데 나의 생각, 나의 행동과 말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사고 아닌 사고를 쳤다. 과 교수에게 맞서고 그 권위에 흠집을 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잘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학내의 문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싸우는 일에 동참했으며 처절한 싸움닭으로 누구도 지우지 않은 세상의 고민을 짊어졌다.


하지만 나는 겁쟁이였다. 나약했고,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으며 생각은 비틀어져가고 생의 모든 것이 시시해 보였다. (정말 시시해 보였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혁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혁명을 이야기하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사랑을 이야기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한계에 좌절하고 관념에 머무는 생각은 현실(실천)로 이어지지 못했다. 당장 한걸음을 걷지 않으면서 너무 정상이 멀다고 투덜대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이건 혁명도 무엇도 아니었다. 나의 사춘기는 거기까지였다. 생각은 더욱 많아졌고,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그렇게 청춘을 소비했다. 그리하여 나의 청춘은 절망이었다. 절망이라는 단어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절망이었다.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 제목을 보며 무릎이 휘청거렸다. 그 시를 열어보기까지 용기도 필요했다. 나는 사랑도, 혁명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여전히 혁명, 사랑- 이런 단어에 가슴이 뛴다.


술 떨어지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도 혁명은 계속되어야 하고, 사랑은 해야 한다. 인간이므로.

수없이 굴종을 배웠다, 수없이 굴욕을 당했고, 수없이 굽혔다. 20대 후반이 되면서 혁명은 고사하고 생존의 문제가 턱에 걸려있었음을 알았다. 혁명의 소중함을 생존의 위대함에서 배웠다, 그리하여 무엇이 혁명이 되어야 하는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묵직함을 알았다. 그런 말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혁명과 사랑은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수 많은 혁명과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존재할 뿐이었다. 혁명이 구호는 아니었음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리고 내게는 혁명과 사랑이 과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 생에 걸쳐 언제나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작더라도 한 걸음을 걷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혁명 다음에 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그 다음의 혁명이라는 것도 알았다. 혁명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혁명의 존재 이유를 말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순수는 흰 바탕의 깨끗한 도화지가 아니라 아주 많은 색을 칠해 너덜 해진 도화지여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혁명은 소리 높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후미진 뒷 골목 허름한 집의 봉창문에서 나온다는 것도.


시인 김수영은 "혁명은 안되고 방만 바꿨다"고 했다. 그걸 읽은 시인 나희덕은 "방도 못 바꾸고 가방만 바꿨다."라고 썼다. 나는 가방도 못 바꾸는 주제였음을 너무도 늦게 알았다. 두 시인의 치열한 넋두리만큼 고민하지 못했던 나는 자괴감에 울어야 했던 밤이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혁명과 사랑이다.


청춘이 절망이었던 시절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병처럼 지나갔던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실패하고 패배하는 혁명과 사랑은 가장 아름답고 공정한 선물을 가지고 늘 어디에선가 기다리고 있다. 실패가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았다, 사랑을 '하'면서. 패배도  상관없음을 알았다, 사랑을 '하'면서. 그러므로 사랑과 혁명을 '할' 수 있는 힘은 괴로움을 '알고도' 뛰어드는 용기일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우산을 접은 채 빗속으로 뛰어드는  일처럼.

어쩌면 우리에게 던져진 숙제는 모든 유한한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와 모든 끝이 있는 것들에 대한 애환을 견디는 일일 것이다. 사랑과 혁명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에게 가장 익숙하고 인간과 가장 닮아있는 인간의 다른 이름으로 그 두 가치는 언제나 존재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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