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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Jan 23. 2017

식사(食事):미식(美食)에 대한 경계

한 끼 밥을 하기 귀찮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무언가를 먹고 싶지 않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때로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다분히 식성은 감성과 맞닿아 있고, 몸의 감정적 상태에 따라서도 매우 민감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입에 넣고 싶지 않은 순간에는 배가 고픈 것도 귀찮다. 어쩔 수 없이 미적미적 움직여서 식은 밥과 조미된 김을 몇 장 꺼내고 김치 한 조각을 꺼내기도 한다. 어떨 때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죄다 꺼내어 대접에 조금씩 담고 밥을 넣어 대충 비벼서 숟가락과 대접만 들고 거실로 나오기도 한다. TV에서는 나의 심정과 관련 없이 희극인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채널을 돌려보면 제법 많은 채널에서 소위 음식과 관련한 먹방 및 맛집 소개 프로그램들이 즐비하다. 언젠가부터 맛집에 대한 혹은 이와 관련하여 민감한 인간의 식성에 대한 시각적 프로그램들이 판박이처럼 방송되고 있다. 신기했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셰프들이 등장하여 십오 분 만에 뚝딱하고 멋진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어떤 쇼보다 긴장되었고 즐거웠다. 전국의 숨은 맛집과 괜찮은 식당들을 소개해주는 프로그램을 보면 그 식당을 위해 어딘가로 여행이라도 가야 할 것처럼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실제로 그 이유로 인해 어딘가로 여행을 가본 사람들이 제법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 역시도 단순히 '먹기 위해' 어디론가 여행을 가본 적이 있다.


식사를 사료(feed)처럼 먹는 일은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식사라는 것은 말 그대로 먹는 '일'이다. 먹어야만 일을 한다던가, 먹어야만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은 너무 슬프지 않은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인간은 다만 '목적 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주장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주장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내가 하는 어떤 일에 대한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이 원초적이고도 자연적인 냉정한 섭리 앞에서 겸손해지기는커녕 때로 우울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들은 이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초적인 본능과 섭리를 또한 다른 방향으로 치장하고 회피하기 위해 요리법을 개발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처음에는 생존율을 높이고 병에 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익혀먹는 것에서 요리라는 것이 시작했겠지만, 그 이후 세균과 병에서 해방된 조리법을 일찌감치 가졌음에도 인간은 조리법의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의 매력이자 인간의 나약함, 욕심이 묻어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시간은 지나고 지나 지금도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들에 대해 맛있게 먹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사는 느낌이다. 식사를 사료 먹어치우듯 허겁지겁 무언가를 하기 위해 먹는 행위 말고, 식사 그 자체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그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하는 중이다. 


'식食'과 '사事'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식사를 사료 삼키듯 먹지 않는 것의 중요성,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삶에 대한 질(quality)'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오죽하면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게 되었겠는가. 좋은 사람들과 저녁시간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혹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되는 일은, 살아가는 일상 안에서 행복의 빈도를 늘리는 일이다. 행복에 있어 '빈도'는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므로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해 나는 인간의 존엄성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먹는 일 : 식사(食事)'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식()'에 방점을 찍을 일이 아니라, '사()'에 방점을 찍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사람과의 만남에 우리는 작든 많든 늘 음식을 놓는데, 이때 놓아지는 음식은 말 그대로 둘의 관계를 보여주는 형식적 절차와 함께 서로에 대한 호감과 예의를 표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식사는 무언가를 위한 목적적 행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행동이자 존재적 행동이다. 그런데 현대인에게서 식사는 언제나 하루 일과 중에 대충 끼워져 사라지는 시간으로 치부된다. 심지어는 그 시간마저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거의 없다시피 한 아침시간, 잠시 잠깐 한 시간 남짓 끼워지는 점심시간, 불규칙하거나 뛰어넘기도 일쑤인 저녁시간.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사(事)'에 대한 질적인 발전은 이뤄지기 어렵다. 그래서 그럴까, 사람들은 말초적이고 본능적인 것에 더욱 쉽게 열광하는 것일까를 생각한다. 먹는 '일'에 대한 질적 발전이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자신의 일상과 고된 생존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는 말초적이나마 화려한 '식'으로 쉽게 스스로를 위안 삼으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여전히 우리의 삶에서 식사는 '식'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음식'을 보다 고급스럽고 복잡한 조리과정을 거쳐 쉽게 맛볼 수 없는 것으로 준비할 수 있으면 고급스럽고 행복한 시간으로 둔갑하는 것으로 쉽게 착각하곤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음식에 대한 감정은 딱 한 가지, '감각적'이고 '원색적' 또는 '말초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도록 제한하고 만다. 음식과 성(性), 혹은 포르노는 제법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요즈음의 맛집에 대한 예찬 행렬들을 보며 딱 맞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진 음식을 보아도 이것은 너무 원초적이고 말초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 말이다. 언젠가부터 이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래서 요즘의 유행하는(?!) 음식들에 나는 별 매력을 못 느끼겠다. 여행지를 가도 굳이 맛집을 찾지 않게 된 이유에 이런 부분도 차지하고 있다. 아주 가끔은 TV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식당에 줄을 서서 다들 스스로 '입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일이 나는 너무 노골적이다 못해 야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니 말이다.


조리방법은 간소하지만,
인간의 몸에 이로운 재료로 만들고,
과하지 않은 양의 음식을,
좋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먹는 행동.
그것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식사도 어느 정도 절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아주 대식가이자 탐식을 즐겼던 사람이었다. 젊어서 레스토랑을 그렇게도 많이 돌며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었지만 그도 역시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달은 것은 나이가 한참 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는 탐식, 대식과 미식에 대해, 그리고 고급한 식재료를 이용하거나 복잡한 조리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진 사치스러운 요리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톨스토이는 음식에 대한 지나친 탐미가 곧 타락을 불러온다고까지 이야기했다. 먹는 것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의 몸은 어떤 행위 자체에서 자신의 인성과 습성, 그리고 취향까지도 학습하는 똑똑한 존재이다. 음식에 대한 어떤 기호나 음식을 먹는 방법, 음식을 대하는 태도 등도 결국 어떤 인간을 형성하는 취향이 된다. 과한 쇼핑에 대해서는 다들 경계하지만, 음식을 많이 먹거나 탐을 내는 일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인식이 별로 없다. 특히 한국사회의 빠른 경제성장 덕분(!)에 여전히 농경사회의 습관이 남아 밥이든 국이든 식사를 많이 해야 보기 좋다는 인식이 있어 그런지, 적게 먹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식습관 역시도 인간이 어떤 삶의 습관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탐식, 대식, 미식 모두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것들이 삶의 질을 올려주지도 행복의 빈도를 높여주지도 않는다. 소비 후에 오는 공허가 밀려오듯이 그 음식들을 먹고 나서도 그렇게 되기 일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뷔페'라는 음식의 장르가 인간 욕심을 음식으로 극대화하여 표현한 형상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쉽다, 음식에 대한 개인의 취향을 다 맞추기 어려워 특정 한 그릇 음식을 준비하기보다는 잔치나 파티에서 뷔페를 준비한다고. 그렇지만 우리는 다 안다. 그 모든 것들을 원하는 것은 위장이 아니라 혀라는 것을. 다만 입에 넣어보고 싶은 욕망에 휘둘린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것을 배 터지도록 욱여넣게 되고, 만족스러워하며, 혹은 불편한 속을 부여잡고 때로 소화제를 먹기도 한다는 것을.

알록달록한 디저트 가게를 지나치며 어떤 생각이 스쳤다.

'저 알록달록한 케이크들에 여자들이 환장을 하고. 나 역시 제법 비싼 값을 주고 저걸 먹지. 그런데 저게 칼로리는 또 되게 높을 거 아니야? 돈 주고 먹고는 또 힘들게 다이어트해야 한답시고 스트레스받으며 난리를 해야 하고. 또 다이어트한다고 돈을 쓰고. 절제를 실천하기가 참 어려운 세상이다. 늘 과한 행동을 해서, 그 과한 행동을 다시 다른 과한 행동으로 되돌려야 하다니.'


다만, 인간은 자신이 먹은 것으로 자신의 몸을 형성할 뿐이다.


냉정하지만 당연한 말이다. 자신이 먹은 만큼의 음식으로 자신의 몸을 형성한다. 생존과 관계있는 말임과 동시에 어떤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왜 몸이 아픈지, 왜 몸이 건강한지, 왜 말랐는지, 왜 살이 찌거나 몸이 붓는지. 지난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여태 탐식, 미식의 시간을 보내며 찌웠던 살들을 고생하며 빼본 경험으로 깨닫건대,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나의 식습관이었다. 운동은 그다음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치장된, 소위 맛집을 돌아다니며 먹는 것을 마치 삶의 질을 확장하고 나의 자의식을 높이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 틀렸음을 알았다. 음식의 모양이 아름답고 조리법이 복잡하고 그리하여 비싼, 그런 음식을 먹어야만 질 높은 식사가 되는 것을 그만두고 싶다. 다만, 좀 더 여유로운 시간을 향유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저녁 '시간'을 원한다. 미식과 탐식보다 그 시간에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먹느냐에, 혹은 어떤 시간을 보냈느냐에 방점이 찍히길 바란다. 음식은 몸을 형성할 뿐이라는 단순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표현을 기억한다면 아마 어렵지 않은 일이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요즘 펍에서 유행하듯 팔리는 맛있는 수제 맥주가 아닌 동네 마트에서 파는 캔맥주를 플라스틱 좌판에 앉아 마시며 늦게까지 친구와 떠들던 일, 어느 맛집의 손만두가 아닌 냉동만두를 쪄 밤늦게 동생과 진간장에 대충 찍어먹으며 서로서로 티격태격하던 일, 어느 유명한 비빔밥은 아니지만 계란 프라이에 엄마가 담근 김치를 찢어서 같이 비벼먹으며 제법 맛있어서 한 그릇을 더 먹었던 일. 그런 소소한 일에 어쩌면 음식 자체보다는 음식과 함께 했던 '일'과 '시간' 그리고 누군가가 기억난다는 것. 먹는 일 그 자체의 말초적인 일을 우리는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 그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음식 자체여서가 아니라 그 분위기와 시간과 사람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맛집을 찾아서 갈 때에도 맛집 자체에 대한 기억보다 가는 길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더 많은 기억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먹는 일'에 대해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이 시간도 나의 몸이 형성되는 시간으로, 그리고 누군가와 혹은 나의 일상에서 보다 더 괜찮은 나의 시간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 그 시간에 이뤄졌던 대화와 그 시간에 일어났던 웃음과 그 시간에 누렸던 여유가 소중한 식사로 기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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