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아니었으면 시詩가 되었을까.

통영 강구안에서 백석의 시를 따라 걸으며

by 경계선

take 1.

백석,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전문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통영까지 가는 길이었다.

길은 막히고 너는 졸기도 했다.

통영에 도착했을때에야 너는 눈을 반짝였다.

통영에서 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끝도 없는 이야기에 날려가는 머리칼을 쓰다듬기도 했다.

너는 내내 나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아무것도 달라질 것 없는 세상에서, 희미한 미소를 나눌 수 있어서.


우리는 여행이라 했지만 이미 우리의 언어로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는 못 쓰고 우리가 하는 말이 그저 어딘가에 기억되길 바랬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달콤했다.



take 2.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사랑도 남의 이야기가 되면 평면으로 박제되어 버린다. 남의 속사정은 알지도 못한 채 나의 사랑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보잘것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너는 너의 사랑이 백석의 그것보다 아름답지 못하다고 불평했다.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사람 노릇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냐고, 그 사람 노릇이 가능해지는 순간부터 사랑은 시작될 것이라고 말하며 나는 너에게 잘난 체 해 보였다. 앞으로 남은 생애를 통틀어 우리는 얼마나 사랑다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유치환이, 백석이 사랑을 했던 도시 통영에서 다시 사랑을 생각했다. 내밀한 골목에서야 생각나는 것이었다, 사랑은.



take 3.

백석, "여우난골족" 전문



어떻게 띄어 읽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던, "여우난골족". 여우-난 골족인지, 여우 난-골족인지, 그렇게 헤매던 시간도 있었다. 너는 나에게 백석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가 어떤 분위기의 사람이었는지. 나는 흥미로웠고, 제법 오래 그 이야기를 들었으며 나도 모르게 많은 부분을 외워버렸다. 그리고 나는 백석의 얼굴을 보고 한참을 반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섬세한 표정과 수려한 이마의 미모를 보며 시詩도 인물이 있어야 잘 쓰는 것이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런 얼굴을 사랑한다. 표정은 부드럽지만 말은 단호하게 하는 사람을. 말이 빠르지 않고 행동이 모호하지 않는 사람을. 그리고 습성은 게으르더라도 눈빛이 희미하지 않은 사람을.



take 4.

백석, "시기의 바다" 전문

사라지고 잊었던 사람을 골목 후미진 곳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잃었던 옛 애인을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달콤한 일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그럴 순간을 상상해본다.

누구의 잘못도 없었던 어떤 이별의 시간을 공간이 삼킨 듯한 그런 만남.

할 말이 너무 많아 인사 조차 자연스럽게 할 수 없는 그런 관계의 만남,

지나고 보면 빛바랜 갱지 위에 그려진 낙서 같이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누구에게 내보이기 민망하며 내밀하고 은밀한 시간과의 만남, 그런 사람.


나는 과거에 실망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꺼내보지 않는 것이라 너에게 말했다. 그러나 과거에 속해진 어느 누군가를 언젠가 만나야 한다면, 만날 수밖에 없다면, 빛바랜 갱지 위의 낙서같이 사사롭길 바란다. 서로가 가진 기억이 다르더라도, 과거의 시간을 거스르듯 꺼내어 대질對質하며 서로를 원망하지 않길 바란다. 어쩔 수 없었던 시간의 우리를 그저 놓아주길 바란다.



take 5.

백석, "삼방" 전문

너와 다시 통영에 온다면 표정 없이 좌수영 통제사처럼 우뚝 서서 강구안을 바라보고 싶다. 파도도 없는 강구안의 짠내를 맡으며 충무김밥이나 질겅질겅 씹으며 지나는 사람들 구경과 거북이걸음으로 줄지어 지나는 관광버스 구경이나 하며. 조금 지치면 강구안 앞에 있는 노점에서 생맥주나 한 잔 하고, 나폴리 모텔을 바라보며 홍상수를 영화내용보다는 가쉽으로 떠들고, 중앙시장의 질퍽하고도 좁은 길을 걸으며 튀는 수족관 물을 피하고 싶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않으면 괜히 유치환 생가까지 씩씩대며 올라갔다가 하릴없이 탄성 한번 질러보고, 이영도와 유치환의 사랑에 대해 열나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 사랑은 어떤 심정일지, 우리 사랑은 사랑이라 할 수 있는지, 도대체 어떠해야 사랑인 건지, 아마 우리는 밤하늘의 별보다 더 길게 헤매며 결국 결론 내지 못하고 지쳐 나가떨어지겠지. 백석도 유치환도 사랑 아니었으면 시詩가 되었을까. 시가 시의 꼴을 갖추었을까. 우리는 어떨까. 시도 못 쓰는 우리가 사랑 아니면 삶이 꼴을 갖추었을까. 해방 이후부터 있었지만 이제는 문을 닫아버려 휑한 건물의 서점 앞에 가서 혀를 끌끌 차보고 소박한 전혁림 미술관에서 기웃거리다 기념품 하나 사면 족하겠다. 그러다가 괜히 우체국으로 가 내심 생각나는 그 사람에게 보낼 엽서를 한번 써보면 좋겠지, 아마 나는 부치지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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