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만남, 그리움

신카이 마코토, <언어의 정원>과 함께.

by 경계선

1. 비가 오면 창문을 열어두는 버릇이 있다. 빗소리를 좋아하고, 비 냄새는 더 좋아한다. 사실 아파트에서 생활하다 보면 집안 구석에 앉아 바깥 날씨를 바로 알아채기란 어렵다. 그래서 '비가 오려면 처마가 있어야겠구나.'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어릴 적부터 비를 좋아했다. 나는 비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특별한 장면이 있다. 우산을 손에 쥐고 일부러 비를 맞으러 뛰어나간 어느 여름이었다. 그때 비를 맞는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의식하여 온몸의 감각으로 느끼려 노력했다. 차가운 느낌과 빗방울이 흐르는 부드러움과 쏴-하고 쏟아지는 청량함과 뿌옇게 가려진 시야의 몽환적인 느낌까지 모두 어우러졌다. 친구 녀석은 처마 밑에서 나를 부르며 그만 들어오라고 했지만 나는 빗속에서 동동 뛰며 소리를 질렀다. 또 하나의 기억은 이별하는 순간에서였다. 그와 이별할 때 소낙비가 쏟아졌다. 그야말로 억수 같은 비여서 우산을 쓰고 있음에도 옷이 다 젖었다.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우리도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별을 겪으며 낙담했다. 우산을 쓰고 헤어져 뒤돌아오는 길에 단 한 번을 뒤돌아볼 수 없었던 그 순간은 사진처럼 기억되었다. 한걸음 디딜 때마다 발바닥에는 물이 차오르고 어깨는 차가워졌는데 내가 운 건지 빗물이 얼굴에 묻은 건지는 기억조차 없다. 전부 20대 초반의 기억이다.

영화 "언어의 정원"의 스틸컷(출처 : 다음 영화정보)


2. 연인이 된 만남은 누구나 그렇듯 모두 우연이었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유난스럽다. 그때의 당신을 우연히 만났던 순간들에 대해 기억을 해본다. 친구로서, 선후배로서, 그리고 아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별 것 없었던 그들과 함께 보냈던 순간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언제나 서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들이 많았지만 관계의 시작은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진정 꽃봉오리 같았다. 특히나 관계의 시작에는 언제나 서툰 말과 행동으로 채워진다. 그래도 지나고 나면 나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작의 순간을 언제나 흐뭇한 미소로 떠올리곤 한다. 습작과도 같은 시간들을 지나 익숙한 관계가 되어 있다는 일에 스스로 대견 해질 때도 있었다.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며,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난 머무를 것입니다.

<만엽집萬葉集> 중에서.


영화 "언어의 정원"의 스틸컷(출처 : 다음 영화정보)

비도 내리지 않고, 새로운 만남도 없었던 어느 시간의 깜깜한 밤에 이 영화를 보며 혼자 소리 내어 오래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등장하는 영화였다. 비, 만남, 투명 비닐우산, 지하철, 비에 젖은 도시, 공원, 맥주, 팍팍한 현실, 꿈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열망, 주워 담을 수 없는 마음. 그런 것들 말이다.

영화 "언어의 정원"의 스틸컷(출처 : 다음 영화정보)


영화 "언어의 정원"의 스틸컷(출처 : 다음 영화정보)



3. 삶의 매 순간에 언제나 빠질 수 없는, 그리움. 나는 무엇에 대한 그리움이든, 우리는 언제나 그리움을 품고 살아간다 생각한다. 아마도 그 생각은 비 오는 날에 그와 헤어지면서부터 하게 된 것이지 싶다. 그리움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을 경험했다는 뜻일까. 그럼에도 그를 계속 그리워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를 다시 사랑하지는 않기에. 사랑이 지나가도 사랑이 없었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랑이 끝나면 사랑을 했던 내가 남는 것이지 예전의 나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사랑을 했던 내게 사랑이 남기고 간 것은 대상을 상실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미처 알지 못하던 어린 나이에는 사랑하고 있어도 사그라들지 않는 그리움에 적응하지 못하던 시간도 있었다. 그런 고민 뒤에 따라오는 싸한 마음을 감당하기까지 제법 오래 걸렸다. 끝나버렸던 지난날들을 돌아볼만큼 어리석지는 않지만 그 대상이 결여되더라도 삶에 그리움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내 뒤에서 걷고 있고, 내 옆에서 걷고 있고, 나를 추동하는 힘으로서의 그리움은 언제나 옳을 것이라 믿고 있다.


영화 "언어의 정원"의 스틸컷(출처 : 다음 영화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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