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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Nov 01. 2017

11월.

우리는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

바람이 제법 스산했다, 때로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을 써야 할 정도였다. 스산한 바람을 통과하기에는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어떤 공간과 시간을 버티는 태도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10월은 낭만적인 한 달이지만 11월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우두커니 그 대상對象을 상실한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11월의 그것은 알 수 없는 감정의 과잉만이 온몸을 감싸 어떨 때는 숨을 몰아쉬어야 할 때도 있었다.


가을은 해질 저녁 무렵 놀이터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같은 계절이다. 겨울보다 보일러 온도를 더 높이고 싶은 계절이기도 하고, 괜스레 길거리를 걷고 싶기도 하고, 예정에 없던 과음을 하기도 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 모든 문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가을 탄다."이겠지만 말이다. 때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터라 언제나 나는 가을을, 특히나 11월을 넘기는 것이 쉽지 않다. 가을은 언제나 목에 자그마한 생선가시가 걸려있는 듯 따끔한 계절이다.


'계절은 사람을 데리고 오기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11월 셋째 주에 부는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어두운 회색빛의 사람이었다. 한겨울의 칼바람도 아니고, 더위가 물러간 후 목덜미를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도 아닌 싸한 느낌이 머리칼을 쓰다듬는 그런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삶에 구멍이 나 있던 나는 그때 <닥터 지바고>를 읽고 있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는 얼른 겨울이 되길 바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침대에 몸을 구기고 바라보니 처마도 없는 창에 비가 그어졌다. 가을에 처음 듣기 시작해서 한꺼번에 열 번 이상 반복해서 들었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다시 틀었다. 


그와의 만남은 여행이었다. 현실에는 없을 것 같은 시간들이 이어졌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러나 사실, 아무것도 우리는 공유하지 않았다. 11월의 나는 일상을 공유하거나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내가 말하고 보여준 것은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당위, 신념, 이성(理性), 이런 것들이었다. 나는 나를 철저하게 속였다. 그는 나의 '허상'을 보고 있었고, 나는 내가 만들어놓은 '허상'속 그리움에 그를 투영했다. 안타깝게도 계절이 지나가도록 우리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제법 오랫동안 서로의 11월에 매몰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일 년 열두 달은 11월이 열두 번 진행될 뿐이었다. 생각을 뱉어내기 위한 배설구로서 서로를 이용했다. 우리는 만나지 아니했어야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험한 사람이었다. 위험하다고 사랑 아니라 할 수는 없지만, 위험을 일상과 공존하게 하는 일은 사랑을 증오하게 했다.


삶의 표피가 벗겨진 것 같은 그 11월을 지나 12월이 되고,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다시 시작이다. 당신도 나도 이제 다시 서로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다시 걸어갈 것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라흐마니노프를 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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