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내밀하게 꿈꾸기.
사람들은 어린 나이의 내게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라고, '성공해야 한다'라고, '네 꿈이 뭐냐'라고, 닦달했다. 그 닦달은 정말 쉼 없는 것이어서 세상에 몸을 맡기고 있는 어린 나이로서는 무언가를 해야 했다. 어른들의 말처럼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고, 독서도 열심히 해야 했다. 좋은 대학도 가야 하고, 성공도 해야 하고, 내 꿈이 뭔지도 알아야 하니까. 그러니 대충한다, 사실은. 그때는 나름 다른 아이들에 비해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이다. 이미 타인과 경쟁을 하는 꿈은 꿈이 아니다. 그저 생존하는 법에 대한 예비과정 정도일까.
서른이 한참 넘은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하겠다. 내 꿈이 이런 것 같다." 하면,
대체로 어른들은 "인생 별거 없다, 그냥 살아라" 한다.
나는 이렇게 쉽게 말을 바꾸는 어른들을 보며 더 이상 어른들의 말은 믿을게 못된다고 생각했다. '결국엔 어른들이 하시는 말이 다 맞다'라고 이야기하는 명제도 싫었다. 그 명제를 나의 방식으로 증명하고 몸으로 체득하기 전에는 아무리 당신들이 맞아도 나는 맞을 수 없었다. 필경에는 어른들이 맞았었더라도, 마지막에 처절하게 그 패배를 인정해도, 나는 지금의 내가 맞다. 나의 틀림이 맞다. 틀림도 맞아야 하고, 고민도 맞아야 한다, 는 생각 전부다 모조리 다 맞다고 생각한다.
30대에 접어든 내게 어른들이 "인생 별 거 없다, 그냥 살아라."라는 말은, 어릴 적 수학 시간에 '0(zero)'이하는 숫자가 없다고 초등학교 때 배우다가 마이너스(-)의 개념이 나타나 처음으로 '0'아래에도 숫자가 있다는 말 같았다. 마이너스의 개념을 처음 배웠을 때 느꼈던 수학공식 같은 배신감으로 다가왔다. 그 수학공식은 학년이 거듭되면서 무리수, 유리수, 허수, 실수 뭐 이런 단어들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야말로 허허실실 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수학은 그저 어려운 과목이거나 재밌는 과목 일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배신'의 개념을 알려준 과목 같았다.
어릴 때에는 주위가 모두가 나의 꿈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학생들을 위한 배려와 인내는 학생이 아닐 때에 알았다. 그러니 학생들을 위한 배려라고 보여주는 일들에 대해 학생일 때에는 그다지 감사할 줄 몰랐다. 감사해야 할 시간도 없었으며, '감사'가 무엇인지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되려 그 배려들이 부담으로 작용할 뿐이었다. 결국 내가 어떤 '값'이 되길 바랬던 것뿐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비싼' 값이면 더 좋을 테고.(사실 이건 결혼을 종용하는 어른들이 보여준 '선자리'에서 확실히 알았다. 좌판에 놓인 고등어 한 마리 같았다, 나는. 그것도 상해 가는 고등어.)
꿈은 어떤 직장이 아님을 알게 된 것도 서른이 넘어서였다.
그리고 주위를 보니 아무도 나의 꿈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꿈을 뒷받침해 줄 사람은 더욱 없었다. 글을 써보겠다 했을 때에, 엄마는 장난이었겠지만 우스갯소리로라도 좋은 표현은 없었다. "네가 그 정도까지 능력이 되니? 글은 아무나 쓰니?"였다. 그래, 사실 내가 그런 능력이 되는 건 아니다. 글은 아무나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꿈은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삶에 늘 함께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죽을 때까지 버릴 수 없는 것, 그것이 꿈이어야 하니까. 어쩌면 꿈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내밀한 무언가 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나만의 공간, 그 안에 견고하게 구축된 또 하나의 세상.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나는 진정으로 내가 품고 있었던 꿈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가족에게는 말해 본 적이 없는 것을 알았다. 정말이었다. 어릴 적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꿈 말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꿈은 한 번도 가족에게 말해본 적 없었다. 그러니 내 꿈에 대해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다. 무얼 지지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간절하고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진짜 꿈은 입에 담을 필요가 없다. 나의 꿈을 지지해주고 돕는 이는 아무도 없음을 실감했을 때에, 꿈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혼자 버려질 때에 진정한 꿈이었는지도 알게 될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에도 걸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저주처럼 내려진 나의 운명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남이 반대하는 길을 주저 없이 걸을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이 아마도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세상을 향한 최초의 걸음 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