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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Oct 09. 2017

가족, 애증의 다른 이름

길고 긴 명절 연휴를 보내며.

고요하고 안락하며 평온한 생활을 즐기는 중에는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으면서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아 섭섭한 마음이 동시에 자리한다. 이 이기적이고 아이러니한 생각은 참으로 간사하다. 독립하여 혼자 사는 삶을 꾸리든, 결혼하여 독립을 하였든 부모는 각자의 삶을 책임지며 자기 갈 길 가는 자녀들을 보면 때로 대견해 보일 테지만, 막상 자기 갈 길을 너무 잘 가는 모습을 보면 막상 부모는 때로 불안해하며 섭섭해한다. 섭섭해하는 감정을 보면 관계 이전에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이기심과 욕심을 눈치챌 수 있다. 다른 표현으로는 관계가 가지고 있는 관성의 법칙일까 생각도 해 보게 된다.


'가족만큼이나 폭력적인 집단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대체로 이런 문장을 이야기하면 나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불편해한다. 부모와 가족은 언제나 사랑의 대상이며,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이고 안정과 평화를 얻는 공간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으므로. 가족은 폭력적이며 부정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학습되어 왔을 것이므로. 그리고 그런 존재가 될 수 없다 믿으므로.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삶에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들은 절대 구호로 외쳐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교육되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당연하다면, 효(孝)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할 때 자연스러움 안에서 삶의 질서를 잡지 않는다. 지극히 모든 것들에 어우러지기 위한 훈련과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사회화'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자연스러움은 무조건적인 선(善)이 아니어서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 질서를 잡기 위해 교육하고 세뇌하고 명언과 격언으로 남겨 되뇌곤 한다. 가족을 사랑과 이해의 대상으로 포장하는 것은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가 작용할 뿐. 모든 가족이 사랑의 다른 말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당위'는 현실과 다르다.


고통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만 받을 수 있다. 별로 친하지 않고 별 관련 없는 사람을 통해 큰 상처를 받지는 않는다. 인간은 그렇게 많은 곳에 신경을 두고 살지 않는다. 나에게서 먼 존재는 나에게 직접적인 감정적 상처를 줄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가족'단위를 증오했던 적이 있다. 결혼을 주저했던 한 때의 이유는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노골적으로 폭력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가족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제약하고 또 제약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이런 대화에 대해 혹자는 "가족이 없어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나."라는 말로 나에게 반박하려 든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동경과 부러움을 품고 사는 존재이다. 가족이 없을 때에 느끼는 감정이 가족이 있어서 느끼는 감정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같은 카테고리의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나는 무엇보다 무엇이 더 낫다고 비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가족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어떤 의미와 관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을 뿐이다.


내가 어려울 때에 직접적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줄 수 있는 존재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삶에 대한 결정권에 참견하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발생하는 문제는 매우 일상적이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부모는 아이에게 자신의 존재를 투사하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강요하기도 한다. 특별한 가족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가정이라도 거의 모든 가족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이를 낳으면서 "나는 우리 아이를 어떤 존재로 키우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부터 부모의 자식에 대한 참견이 시작되는 것 아닌가. 의도가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관계에서 없앨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도 사랑한다면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로서의 역할, 자격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은 때로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간격을 소멸시키고 숨 막히게 하기도 한다. 이런 관계의 속성을 생각하면, 부모 자식 간에도 성숙한 관계 맺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관계에 대한 설정과 서로의 입장을 재정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먼저 나는 가족 안에서 나는 각자의 인생에 대해 참견하지 않을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가족 간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절제이다. 위험에 뛰어드는 아이에게 지적하지 않을 용기가 쉬울리는 없다. 아마 매우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디까지가 참견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가족 내에 토론과 고민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가족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필연적 관계(내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만들어진 관계)는 서로의 존재만으로 행복감을 선사하는 관계가 아니다.


필연적 관계는 함께 있으므로 행복'해야'하는 수동적 관계이다. 관계 내의 근본적인 수동성을 능동적인 사랑으로 바꾼다는 것은 매우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다. 특히나 자녀의 입장에서는 부모를 무조건으로 사랑하는 일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부모 역시도 아이를 낳는다고 사랑이 자동적으로 장착되는 것이 아니다. 모성과 부성은 아이를 키워내는 과정에서 함께 길러지는 것이라는 것 즈음은 누구나 공감한다. 부모는 아이를 보살피고 안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입장이 되므로 대체로 동등한 입장이 되기가 쉽지가 않다. 물론 모든 가족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가족은 그런 경우가 많았다. 아이도 부모가 자신을 어른들과 동등한 입장으로 자신들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 특히 10대가 되면. 그러므로 자녀들은 어른이 되기 위해 반항하고 자립하고자 한다. 자신의 부모가 밖에서 아무리 좋은 어른이라 해도 집 안에서 자녀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를 잘 보기 힘든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진정으로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려면, 부모는 자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야 한다. 사랑은 존재 그 자체여야 하므로. 그러나 나는 그런 부모를 내 부모를 포함하여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 부모들이 나쁜가. 그건 아니다. 인간으로서, 누군가를 낳고 기른 그 정도의 책임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위대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그것을 사랑의 힘이라고 미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어떤 사랑과 기대, 욕심 등을 바라지 않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 어찌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사랑은 예외적 경우이며 고난과 시련의 경험이며 실패와 고통을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혼자 덤비게 되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다. 이 또 다른 세계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근본인 가족에게서 경험될 수는 없다. 알을 깨고 나가는, 세계를 깨고 나가는 일은 그 자체가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어찌 내가 태어난 이 공간에서 찾을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은 내가 태어난 곳 바깥에 있다. 가족 안에서 사랑이라는 미명을 들먹이며 서로를 괴롭히지 말자. 태어나자마자 거저 얻어지는 심리적 안락함과 애정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그렇게 쉽게 얻어질 것이라면, 집에서 안주하면 될 일을 우리는 왜 굳이 상처받고 힘들더라도 가족 밖으로 나가 연인을 만들고 사랑을 나누는가. 어떤 의미에서든,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다. 부모는 자녀를 통해 사랑을 위한 헌신이라는 덕목을 배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녀는 그렇지 않다. 태어나 거저 얻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부모를 통해 체득한 배려와 인정을 어딘가에서 자연스럽게 누군가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할 뿐. 그래서인지 가족 간의 사랑은 항상 편도이다. 부모는 항상 외롭다. 앞서서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을 하는 사람의 숙명이다. 모든 부모는 그래서 위대하다.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지만 외롭고 죄책감도 들고 때로 그들에게 매달리기도 하면서, 평생을 끌려다니는 그 모습 자체가 숭고하다.


가족은 선택한 관계가 아니기에 벗어날 수 없다. 그 묶인 애증의 관계는 죽어야 끝나는 쇠사슬 같은 것이어서 위험에서도 나를 등지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주기도 하지만(물론 이 마저도 아닌 가족도 있다는 사실에 새삼 절망스럽지만), 그 쇠사슬의 무게 때문에 신음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의 일생을 보면 대부분은 지루하고 아주 가끔 행복하거나 또한 가끔 불행할 뿐이므로 쇠사슬의 무게를 우리는 십자가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일이 흔하다. 이 관계에 대한 정의를 '애증'이라는 이름 말고 다른 표현을 붙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애증의 관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길 바란다. 특히나 스무 살이 넘은 자식과 부모의 관계라면 이제는 서로에 대한 에너지를 그만 놓을 때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인해 같이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가 어떤 삶의 의지를 가지고 어떤 삶의 모습을 가지든 인정해줄 수 있다는 것은 그다지도 어려운 일일까. 각자가 즐거운 일을 하고,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각자의 생활 패턴을 가족 안에서 한정 짓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각자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지지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명절의 끝에서 우리는 항상 가족이라는 단어 앞에서 괴로움을 토로한다. 이런 종류가 명절이라면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긴 인생을 살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한 번도 명절이 즐거웠던 적이 없다. 이번 명절도 그렇다.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면 보람은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뿌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즐겁지는 않다. 가족과의 관계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농사짓던 시절에는 푸지게 먹을 수 있는 가을철 수확의 계절이니 동네마다 함께 모여 파티를 벌였겠지만(멀리 갈 것도 없이 다들 동네 안에서), 요즘같이 대부분이 타지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거나 개인사업자가 대부분인 산업사회에서 쉴 수 있는 시간도 고정되어 있는데 제법 긴 연휴에 자신이 원하는 일을 더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때로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쉴 시간이 없다. 명절은 명절이라 가족을 만나야 해서 다들 힘들다.(제사 문제나 기타 등등은 더 문제가 많다.) 하루 종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루종일 늦잠 잘 시간이 있는 현대인이 그리 많을까. 각자의 시간과 고립의 시간이 필요한 현대인의 삶에서 가족이라는 의무까지 강요당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한 일이 아닌가.


가족을 나는 자주 못 봐도 된다고 생각한다. 봐야 할 때 보는 것 말고 보고 싶을 때 보면 좋겠다. 그리고 볼 때만큼은 서로가 반가운 얼굴로 부담 없이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족 간의 모든 잡음은 이 두 문장이 전제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 나빌레라의 이 글은 아래의 글과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

https://brunch.co.kr/@navillera/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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