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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Sep 19. 2017

가을의 시詩는 시간時으로 흐르고,

세상의 흐름을 규정하는 '시간'은 너무도 주관적이다. 누군가의 노력의 결과물이었으므로 나는 몇 시 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사실은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도 별 의미가 없다. 가끔 숫자 말고 다른 기준으로 나의 '시간'을 되뇌어보곤 한다. 그 많은 기준 중에 제법 '고귀한' 기준으로 나는 詩를 꼽는다.


나의 어떤 의식의 흐름에는 윤동주처럼 부끄럽다가 조지훈의 나빌레라와 백석의 당나귀를 지나 때로 신석초처럼 울다가 정지용처럼 그립다가 나희덕처럼 네 이름을 부르다 함민복의 경계라는 곳에 서 보았다가 이성복에서 래여래반다라를 연거푸 되뇌며 한참 머물렀다. 나의 어떤 시간은 그러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김선우, 정호승, 최영미, 황지우, 기형도, 오은, 이현승에게 기웃거리기도 했다. 또 기억나지 않는 어느 지점에서 나는 어떤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마 당신과의 어떤 시간들도 이 중에 어느 지점이었을지도 모른다.


詩의 공간에서 時를 느끼고 있으면 그야말로 '나 스스로가 우주 한가운데에 서 있나?'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무수히 흩어지고 만났던 수많은 스침에 머리가 어질 해 지기도 한다. 참 많이도 기쁘고 슬프고 아련한, 그야말로 詩같은 시간들을 보냈구나.


만남과 헤어짐은 반복되고 헤어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마다 나는 항상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에 늘 물음표를 찍게 된다. 그러나 그때마다 매번 허리를 곧추세우며 생각을 고쳐 앉는다. 서로를 그리워하기보다 기억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면 어떨까 하고. 시는 언제나 다시 읽힌다, 기억되므로. 시처럼 우리도 기억되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나만이 알고 있는 당신이 나의 '기준'으로 아름다웠던 '시간'이라는 벽에 박제되어 있길 원한다. 한정된 시간을 무한으로 쪼개면 결국 영원이 되므로.


한해 한해 인연은 많아가고 마무리는 되지 않아 애 먼 글 먼 속만 탄다.

그리고 속이 타는 어느 시점도 지나면 어떠한 詩의 지점에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서있을 것이다.

나는 시처럼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 있는 그 곳이 또 다른 時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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