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먹지 않았다면 희생되지 않았을 생명이 있었다.
나는 개를 좋아한다. 나는 고양이도 좋아한다. 얼마 전에는 고양이 사진을 보기 위해, 쓰지도 않던 SNS 계정을 다시 열기도 했다.(그 계정을 팔로우하기 위해.)그리고 특정 고양이 사진이나 특정 강아지 사진을 보고 1박 2일 이상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 표정에 얼마나 많은 행복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어릴 때 아버지는 진돗개를 한 마리 데리고 오셨다. 어릴 적 기억이라 정확히 어디서 데려오셨는지 모르겠지만, 흔한 말로 누군가에게 새끼를 한 마리 얻어오셨다. 아버지는 개를 좋아하신다기보다, 어떤 과시욕 때문이었다. 산에 같이 사냥(!)을 간다든지, 남들 앞에서 조금 더 멋져 보이기 위해(?) 진돗개를 키우려고 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강아지와 나와의 만남은 생각보다 각별했다. 사실상 아버지는 개를 방치했고 필요할 때만 개에게 다가가 밥도 주고 쓰다듬어주고 하셨지만, 나는 혼자 마당에서 울고 있는 그 녀석이 안돼 보여서 내 방에 데려와 같이 놀다가 잠들기도 했다. 아침에 개를 데려와 재웠다는 게 들통나서 엄마에게 혼나고 개와 함께 두들겨 맞기도(?!) 했다.(엄마는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개를 강제로(!) 데려와서 더 싫어하시기도 했다.) '반려'라는 개념도 생기기 전이었지만 나는 그 개를 지금도 잊지 않는다. 생김새도 그대로 다 기억하고 있고, 내게 어떤 표정을 지어 보였는지도 생생하다.
벌써 20년도 더 된 그때를 떠올리면,
이제 나는 반려로 어떤 생명을 키운다는 것에 대해 주저하게 된다.
사실 집에 화초를 세 그루 키우고 있다. 키운다는 일이 얼마나 큰 이기심으로 시작하는지를 식물을 키워보며 느끼게 되었다. 나는 식물이 '이뻐서' 사 오거나 얻어오는 일로 시작했다. 나는 식물의 생명력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무지한 것으로도 모자라 무시했다. 식물은 우리 집 베란다에서 적응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을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어둑해지는 밤까지 아무도 없는 낯선 공간에서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햇빛을 어떻게 받는지, 어떤 표정으로 바람을 받아들이는지, 물은 얼마나 필요한지, 이런 것들을 별다른 보살핌 없이 혼자서 터득해가며 움직일 수 없는 자리에 적응하느라 하루를 다 써버렸을 날들이 허다할 것이다. 나는 그런 것들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사 올 때의 모습 그대로 '이쁜'모습이 달라지지 않길 바랬다. 그럼에도, 나는 식물에 대해 공부하거나 키우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화초는 우리 집 베란다에 적응하기 위해 모습을 바꾸어나갔고, 조금씩 자라기는 했지만 내가 원하던 '이쁜' 모습에서 멀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결국 나는 물을 안 줘서, 물을 너무 줘서, 통풍을 못 시켜서 등등의 사인死因으로 몇 그루의 화초를 죽여 없앴다. 그리고 죽은 화초의 화분을 정리하고 비우는 일을 하면서 내심 마음 한 공간이 알 수 없는 형태로 불편했다.
함께 살고 키우려 데려온 것인가.
단지 이뻐서 소유하고 싶은 것인가.
죽은 여러 식물들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나의 손에서 죽어나간 그 식물들을 잊지 않고 있다. 그 자양분으로 이제 조금 식물의 마음을 익혀가는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를 키우겠다고 마음먹음과 동시에 희생되는 수많았던 화분들을 생각해야만 한다. 내가 마음먹지 않았다면 희생되지 않았을 생명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이기심은 이렇게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떤 생명을 죽이고야 말았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의도하지 않게 죽인 것이 더 아픈 일이라는 것도.
"나만 고양이 없어."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천만에 육박하는 시대이다. 티브이에도 반려동물과 관련한 프로그램이 넘쳐나고, SNS에는 온갖 댕댕이와 고먐미들이 귀여운 얼굴을 보여준다. 요즘의 나는 댕댕이와 고먐미 때문에 SNS를 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너무도 피곤한 날은 내가 좋아하는 특정 댕댕이를 보며 마음을 추스르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SNS에는 특정 반려동물들을 사랑하는 랜선 언니, 누나, 오빠, 형들이 넘쳐난다. 나만 고양이도 없고, 강아지도 없다. 그렇게 좋아하는데, 나.만. 없.다.
그들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나는 그들을 키우지 않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집에 돌봐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은 내가 반려동물을 들일 수 없는 이유이다. 아침일찍 출근해서 저녁은 되어야 퇴근하는 나의 일상과 일주일에 몇 번씩 운동하고 오느라 밤9시가 되어 퇴근할 때도 있는 나의 일상을 보면 말이다. 내 욕심으로 무언가를 키우는 일은 그만해야 할 것 같다. 집에서 늘 녀석들을 돌봐줄 수도 없고, 여행을 다니는 일도 좋아하는 나로서 집을 비우는 일이 다반사인데,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은 또 다른 생명을 괴롭히는 일밖에 되지 않겠다 싶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일은, 그래서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 일이다.
무언가를 키운다는 것은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둘 중 한 생명이 끝날 때까지.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서로의 반려자를 챙기는 일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모든 사람들이 대단해 보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반려자든 반려동물이든 함께 산다는 것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다. 반려자는 동등한 위치라도 되지만, 반려동물은 사람보다 약한 존재이다. 반려동물은 인간보다 수명이 짧기 때문에 인간이 키울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그 죽음까지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인간보다 오래 사는 동물이나 인간보다 생명이 무한한 것들에 대해서는 인간이 키우거나 소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제 스스로를 먹이고 보호할 수 없는 약한 존재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나는 적어도, 하루 종일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게 되거나 은퇴를 할 시점이 되어야만 반려동물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니 그때가 되면 또 내가 너무 늙어 힘들어질까 걱정이 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