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

사랑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by 경계선

당신이 사랑이고 사랑이 곧 당신이 되는 그 기적 속에서

사랑은 당신이 사라진 순간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의 존재는 당신의 부재不在를 통해 확인된다.

사랑에 닿는다는 것은 그래서 어려운 일.

사랑이 당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항상 너무 늦었다.


사랑은 깊은 바닷속에 침잠한 보물선과 같았다.

존재는 확인되었으나, 닿기까지는 험난한.


늦은 길을 돌아 되짚어가다 보면 늦었다는 사실만 분명해질 뿐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나침반 위에서

냉정한 머리와 여전히 말캉한 마음과

까칠한 질감의 일상은 박자를 맞추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이다.


당신과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에도 사랑은 실존했다.

더없이 선명했던 미조 해변의 모래알처럼,

해풍을 먹고 자란 소나무의 얽힘과 간격처럼,

대화의 길을 잃어버린 파도의 소리처럼,

어느 순간에도 당신은 일상처럼 존재했다.


흐르는 물길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듯

자라는 나무뿌리의 깊이를 알지 못하듯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사랑이지만 사랑은,

모든 순간의 날씨로 변주되었다.

감추어져 있다고 사랑이 아니겠는가.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이 아니겠는가.

변주의 폭이 깊고도 넓어 혼돈의 땅으로 꺼지는 것은 오직 나.

그러니 속지 않을 수 없고 또한 믿을 수 없지만

울며 울며 어디론가 전진하는 것,

사랑.


어쩔 도리 없이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갈구한다.

보물섬보다도 깊게 잠들어버린 당신을 갈구한다.

가려진 블라인드 틈새로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는 햇살을 보며

이제는 그만두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

이전 04화네가 있었던 공간이라면 시간은 상관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