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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Nov 02. 2017

네가 있었던 공간이라면 시간은 상관없어.

사랑은 시간일까, 공간일까.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경험할까. 오래전 찍은 사진을 보며 옷차림새와 짧아진 머리칼 등을 통해 지나간 시간을 실감하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산다고 이야기하기에는 허술한 구석이 많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다만 '공간'을 이동하고 사람을 '바꾸어' 만나고 있을 뿐. 그리하여 나는 시간이 '쪼개진 공간'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시간을 경험하는 방법은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다. 공간의 이동 없이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음악'을 들을 때이다. 그러므로 음악 또한 시간을 경험하는 행위이다. 그것도 아주 섬세하고 세밀한 경험이다. 박자를 쪼개고 음의 높낮이에 따라 공기를 당겼다 밀었다를 반복한다. 그때 쪼개지는 박자는 창조적이며 다시없을 한 번의 구현이 된다. 그리고 그때 이어지는 멜로디는 공기 중의 어떤 성분들 사이로 곡예처럼 딱 한번 미끄러진다. 삶이 한 번으로 끝이듯 음악도 그렇게 특정 시간을 딱 한번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렇지만 역시나 음악보다 더 극적인 시간은 어떤 공간속에 놓여진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김정권 감독, 영화 <동감>의 포스터


1. 시간은 같지 않지만 같은 공간에 존재했던 사람들이 우연하게 인연이 되는 것을 영화로 보았다. 2000년에 개봉했던 김정권 감독의 영화 <동감>이었다. 어떤 공간과 만난다는 것은 제법 많은 종류의 경험을 가능케 한다. 물론 그 공간을 기억하고 만나고 싶은 대상에 대해 알게 되고 원하게 될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모든 장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숨 쉬고 지나갔지만, 그 숨소리가 누구에게나 들리지는 않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의도에 의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니 말이다. 가까운 과거와 미래의 시점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어떤 시점의 어떤 교차점에서 만날 수도 있음을, 그 가능성을, 신기루 같은 가능성을 기적이라 의식하지도 못한채 지나치고 만다.


만나지 않고도, 

같은 공간을 누렸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각자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다.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는,

그 먹먹함이 본능처럼 밀려와 때로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되뇌고 싶을 때도 있다.

그것을 우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기억의 한 편으로 남겨둔다.

그리고 불쑥 꺼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영화 <너의 이름은.>의 포스터


2. 신카이 마코토는 내게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절절하게 전달했다. 그런데 그 그리움의 대상이 늘 알 수 없다는 점에 방점이 찍힌다. 나는 때때로 그립다.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으나,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찾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지날 때가 많다. 이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입 밖으로 꺼내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늘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울게 된다. <초속 5cm>, <언어의 정원>에서도 그랬다. 영화 <너의 이름은.>의 주인공들처럼 알 수 없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그리움의 실체는 그렇게 스스로의 감정을 비집고 들어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부지불식간에 눈물이라는 형태로 찾아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립다는 것은 무언가와 마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더라도 우리는 마주 보고 앉은 사람이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착각이다. 각자의 우주 안에서 각자의 흐름에 맡기며 각자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잠시나마 서로를 같은 '의미'로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고 기적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같은 '시간'에 존재하기보다 같은 '공간'에 있기를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각자가 다른 시간을 살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장소가 같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리움의 정점에 신카이 감독은 '기억'을 올려두었다. 시간은 그렇게 나약하게도 무언가를 잊게 하기만을 할 뿐이지만, 공간은 기억을 꺼낼 수 있는 매개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시간을 거슬러 기억하고자 했다. 서로를 기억하면서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대에 각자가 따로 누려보았다는 것은, 이미 서 있는 그대로 충분히 만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미 많은 것들을 나누웠고, 그다음의 욕심은 각자가 따로 누렸을 공간이 같은 시간으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과 공간이 일치하는 어느 혜성 같은 순간이 올 수 있다는 것도.



3. "우리, 이 횡단보도에서 과거에 마주친 적은 없었을까."

우리는 서로를 만나기도 한참 전부터 당신은 이 동네에 살고 있었고, 나는 이 동네에 자주 드나들었다. 우리는 서로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 장소 어느 언저리에서 스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때 어느 시점에서 연결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한 숨을 쉬며 건넜을 이 횡단보도에 나는 친구와 깔깔대며 지나간 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공간을 각자가 따로 누리고 있었다는 것이 때로 신기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일 수도 있고, 망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때로 과거의 언젠가에 우리가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은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당신의 눈동자 속의 눈부처처럼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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