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계선 Nov 07. 2024

'문명'이라는 단어의 허상을 고발하다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우화라고 하기엔 너무도 신랄하고 묵직했다고 해야 할까.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명이 이렇게 나약하고 신기루 같아 보이다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지, 이 나약함이 얼마나 큰 잔인함에 닿아 있는지, 그 잔인함이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극단적 생각까지 하고 있는. 나는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 나의 나약함과 인간의 잔인함 사이에서 출구 없는 생각들로 맴을 돌다 보니 보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다. 이렇게까지 그대로 굳이 보여주어야 했나, 박찬욱 감독의 복수 시리즈의 영화 <친절한 금자 씨>를 볼 때처럼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소설이었다. 이런 불편함이 오랜만이라 다 아물었던 상처를 다시 후벼 파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용은 너무도 쉽게 읽혔지만, 쉽게 읽히는 것조차 나중에는 거북했다. 때로 중간에는 헛구역질을 삼켜가며 읽어야 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꼭 짚고 싶은 부분은, 민음사 판의 번역이 너무 구리다는 것. 구리다고 밖에 표현이 안되는데. 재번역이 빨리 되었으면 하는 바람.)


아이들은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떨어진다. 떨어진 아이들은 모두 남자아이라는 것이 조금은 낯설고 어색하지만, 그 또한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면 적당했다는 마음마저 드는 삐딱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구조되기 위해 해야 하는 행동과 구조되기 전까지 살아남을 생존의 행동 중에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로 두 개의 패로 갈린다. 

"랄프"는 대장으로 선출되었다, 아이들의 박수와 호응 등으로. 랄프는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지를 설명하고 탈출하기 전까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갖추고, 지속적으로 봉화를 피워 올려 우리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재차 설득한다. 그러나 모두가 랄프의 이야기에 동조하지 않는다. 랄프의 바람직하고 또렷한 목표보다  논리와 상관은 없지만, '힘'으로 우위를 점하고 싶은 본능이 앞선다. "잭"은 사냥을 제안한다. 사냥'놀이'라고까지 말하며 멧돼지를 잡아 파티를 하고 여러 아이들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주며 따르기를 종용한다. 인간 사회에서의 대중(mass)은 합리적/이성적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보기 좋게 빗나가는 것은 이 아이들이 택하는 선택을 보면 쉽게 이해된다. 아이들은 옳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는 "랄프"를 인정하면서도 "잭"의 힘과 당장 맛볼 수 있는 멧돼지를 무시하지 못한다. 즐거움과 기대로 "랄프"보다는 "잭"을 따르는 경우가 많아진다. 잭은(어떤 인간들은) 아이들의 군중적인 심리를 이용할 줄 아는 본능을 스스로도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대체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이 어떤 합리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의 행동은 대체로 비합리적이고 매우 드물게 합리적 행동을 시도하려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건의 전개에서 그다음을 예측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의미 있지만, 인간의 합리성은 너무도 허술하기 때문에 예측은 대체로 빗나간다. 감정과 심리에 쉽게 휘둘리는 대부분의 인간은 어디로 그 마음이 향할지 알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더 슬픈 것은 어디로 마음이 향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스스로가 합리적인 존재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나약함과 무지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저지르는 거의 모든 잘못의 원인이다.


이 소설에서 여러 부분에서 인간의 추악함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 가장 읽기 힘들었던 부분은 암퇘지를 사냥하는 장면을 묘사해 놓은 것이었다. 소년들이 창으로 찌르고 돼지 위에 올라타 튀는 피에 온 얼굴이 젖는 장면, 그리고 소년들이 나른해진다는 장면. 단순히 어떤 생명을 죽이는 장면이라고만 읽기에는 매우 폭력적이고 선정적이었다. 흡사 성폭력의 상황으로 읽히기도 했던 이 장면은 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 힘과 권력, 인간 내면의 잔혹성을 동시에 모두 보여주는 어떤 총체적인 지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소년들은 랄프에게서 완전히 멀어져 간다. 이성적 상황과 합리성을 포기한 소년들은 군중심리에 이끌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골치 아픈 일들을 접어치운다. 생각하지 않는 삶은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정의한 '악'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도처에 깔려있는 '평범함'인지 깨닫게 해주는 내용들이었다.


불을 피워 구조요청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실행에 옮기는 소년 또한 아무도 없었다. 마치, 우리가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냥 그렇게만 하지 않고 사는 것처럼. 담배를 피우면 암에 걸릴 확률이 높음을 알지만 피우는 것처럼. 인간은 때로의 타락이 필요한(본능인) 존재일까 생각마저 드는 장면이었다. 불을 피우는 일은 랄프와 그를 따르는 세 명 정도만 그 일을 멈추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더 비극인 것은 소년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알 수 없는 공포를 이용해서 잭이 소년들을 규합시키는 장면은, 사회 지도층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읽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공포의 실체를 밝히려는 사이먼을 소년들의 집단행동으로 죽이고 마는 장면에서, 나는 아연실색했다. '공포'가 사라지면 인간은 '규합'할 수 없다. 이쯤 되면 인간이 만들어놓은 문명은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이 얼마나 가식적인 문장인가. 랄프와 함께 의견을 모으고 구조를 위해 소년들이 결집해야 함을 주장했던 똑똑했던 소년 "돼지"라는 인물이 죽는 장면은 예상할 수 있었으나 너무도 큰 절망이었다. 언제나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지식인들이었다. 똑똑하다는 이유로, 언제나 그들은 권력에 이용당했다. 지식인들의 순결을 업신여기는 사회는 오래가지 못했으나, 대체로의 권력은 이 역사를 배우지 못하고 등장하고 망해가기를 반복하며 역설적으로 이 역사를 지탱했다. "돼지"라는 인물의 죽음 이후 이 소설은 빠른 속도로 결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랄프가 잭에게 잡힐 뻔한 순간, 어른들이 타고 있는 배가 도착하고 그들은 맥락 없이 구출되었다. 구출은 우연이었고, 어떠한 노력의 산물도 아니었으리라.(결국 인간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존재일까. 어떤 노력과 원인도 없이, 결과만을 바라는.) 그리고 랄프가 그 해군 장교 앞에서 목놓아 울기 시작할 때, 나는 랄프가 어른이 되었으리라 직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랄프도 순결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살인을 경험했고, 질서를 지키지 못했으며, 폭행과 성적 욕망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을 그때,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추방당하는 그 상황과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모든 인간이 원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기독교적 주장에 나는 일면 동의한다. 어떤 순결성을 겁탈당하는 순간의 랄프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이다. 잭의 창으로부터 벗어나긴 했지만 랄프가 겪었던 그 모든 일들이 없던 일이 되지 않을 것이다. 랄프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어떨까.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어떨까. 인간이 신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신랄하다 못해 날카로운 칼끝에서도 춤을 추며 피를 흘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어리석음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신은 그리하지 않겠지. 그래서, 나는 인간 사회에서 절망을 본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의 그것, 희망이다.



덧) 윌리엄 골딩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였음을 이번에 알았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노벨상이라는 상의 지향을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되었을까 싶다. 시공을 초월한 인간 모두에게 끝날 수 없는 주제, 고통과 사랑 그리고 인간으로서 지키고자 하는 가치. 그런 것들에 대한 문학적 표현이 탁월한 작가여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등의 작품들에서도 결국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시적 고발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채식주의자>에서의 주인공이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진절머리를 쳤던 것처럼. 인간은 그 폭력성을 내재하면서도 폭력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발버둥 치는 존재이다. 인간에겐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고 그 공존에서 우리는 매 순간 치열한 전투를 치른다. 오늘은 이겼을까. 내일은 이길 수 있을까. 오늘 지더라도 내일 이길 수 있고, 내일 이기더라도 그다음 날에는 또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싸움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 고귀함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생명체라는 점이다. 노벨 문학상 작품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 감격에 며칠을 달 떴다. 우리의 글자가, 세계 문학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김영하 작가의 축사에 숟가락 얹고 싶어 진다. 한동안 더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 같다. 그의 시적 산문이 우리 문학의 근간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