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투르게네프, <연기>
사랑은 모든 삶을 변주한다.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의 소설은 건조한듯하지만 생생하고, 그림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그를 위한 표현일까 싶을 정도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보다도 서구에 심취했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왜인지 그들보다도 투르게네프의 소설이 읽기에 문화적으로는 더 익숙하다. 유럽과 영미 문학을 러시아에 번역하여 소개하고,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영어나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유럽에 전한, 러시아 문학이 세계문학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큰 힘이 되었던 작가가 투르게네프라고 역자는 말했다. 투르게네프에게는 이야기가 짧더라도 사유의 광활함이 있다. 엄청난 서사를 가지고 있는 톨스토이 작품이 이야기 자체의 탄탄함을 힘으로 밀고 가는 소설이라면 투르게네프의 그것은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이지만 그 속에서 러시아 특유의 사상과 사유의 스케일만은 쉽게 느낄 수 있다.
시대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그의 소설은 시작한다. 비판의 대상과 크기, 비판의 내용도 분명하고 작가 스스로 사회를 바라보고 싶어 하는 그의 시각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소재가 사랑이면서도 천편일률적이지 않기란 쉽지 않은데 말이다. 소설에서 소재가 사랑이라기보다 주제가 사랑이지 않냐 말이다. 나는 사랑에 대한 사탕발림과 예찬 없이도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이런 글쓰기를 좋아한다. 이런 종류의 사랑 이야기를 나는 즐긴다. 이런 종류의 혼란스러움을 사랑한다.
어느 고전이든 고전은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조금은 어려울 수 있다. 이 소설도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상황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면 이야기의 표피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는 아마도 약간 역부족일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파편으로 겉핥기로만 공부했던 러시아 역사를 기억에서 되짚으며, 또는 몇몇 사건과 용어는 검색으로 내용을 보충해가며 읽어갔다. 물론, 용어들을 모른다고 해서 소설의 진행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욕심일 테다.) 러시아 소설을 읽는 데 있어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것은 역사적 내용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러시아어 등장인물의 이름들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겠지. 오랜만에 러시아 문학이다 보니 초반부터 우르르 등장하는 러시아 등장 인물들이 입에 감기지도 않는 러시아식 이름들을 구별하는 것에 제법 시간을 들였다.
투르게네프는 19세기 유럽을 지향하지만 아시아에 끼지도 못했던 제정 러시아의 혼탁한 사회, 서구화만이 근대화라는 신념에 가득했던 러시아 인텔리겐챠들의 생각과 방황, 인텔리겐챠에 반하는 복고주의의 반동적 생각과 사상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담았다. 소설과 사회과학 서적의 경계에서 서두르지 않고 주인공 ‘리트비노프’의 입을 통해 작가의 냉철한 생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작가의 목소리를 직접 넣어 “독자”를 부르는 대목들이 이 소설의 글쓰기가 나에게 혼탁한 시대적 배경을 다정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19세기의 프랑스는 자유주의 혁명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였다. 그 영향으로 국경을 따닥따닥 맞닿고 있던 프로이센(곧바로 독일로 통일)과 이탈리아 등도 인권과 정치, 어떤 이데올로기들을 시험대에 삼아 세상을 운영하고 좌초하며 역사의 날실과 씨실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어느 시대든 역동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마는, 19세기의 자유주의는 20세기의 베타 버전이랄까. 선거권과 관련하여, 인간의 존엄과 관련하여,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문명의 근본들을 근사하게 건축하던 시절이었기에 의미 있다. 그 시절의 러시아는 농노(농민 노예라고 불러도 될까.) 해방의 문제, 정치권력과 체제의 형태와 관련한 문제 등으로 많은 좌충우돌이 있었다. 허울뿐인 “차르”는 끝까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했을 것이지만, 자유주의는 “신분과 구태의 타도”를 차르의 귀에 제일 먼저 전달했을 것이다. 귀족이라는 신분들은 과거로 돌리고 싶었을 것이고, 껍데기만 남은 허상을 사교계에서 돌림노래로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시절이나 젊은이들은 사랑을 하지! 주인공 ‘리트비노프’는 어렸을 때의 첫사랑 ‘이리나’를 이국의 땅(프로이센의 바덴 바덴)에서 우연히 만난다. (이국의 땅에서 만났다는 설정도 그때 당시 러시아 소설가 중에는 투르게네프만이 가장 자연스러웠으리라 생각한다. 유럽으로 따지자면 섬 같은 러시아가, 아시아로 따지기엔 너무 유럽 같은 러시아는 자아가 너무도 강했다. 러시아 사람이 다른 나라에서 다른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 우리나라가 서양을 받아들이지 않고자 문을 걸어닫았던 구한말의 상황과 사뭇 비슷하다.) 사교계의 고인물이자 고혹적인 매력을 간직한 이리나를 본 순간, 약혼녀가 있는 리트비노프에게는 불행이 닥쳤다. 가야 할 길이 있는 제정 러시아에게 역사적 반동으로 발목을 잡는 그 소모적인 희생처럼 말이다. 이 짧은 소설에 이런 내용들을 모두 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책을 다 읽고 나니 새삼스럽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나에게 투르게네프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다.”라고 이야기했다는 문구가 책의 뒤표지에 적혀 있는 문장이 눈에 띈다.
“연기다, 연기.” 그는 여러 번 되뇌었다. 갑자기 그에게 모든 것이 연기처럼 보였다. 그 자신의 삶도, 러시아의 삶도, 인간의 모든 것도, 특히 러시아의 모든 것이 연기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연기고 수증기’라고 그는 생각했다. 마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 같고, 도처에 새로운 형상들이 나타나고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것이 똑같다. 모든 것이 급히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지만, 모든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풍향이 바뀌면 모든 것은 반대쪽으로 몰려간다. 그리고 거기에 똑같이 지칠 줄 모르는, 요란하고 불필요한 유희가 다시 시작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자기 눈앞에서 시끄럽고 떠들썩하게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 이반 투르게네프(이항재 옮김), <연기>, 문학과 지성사, p.259
이리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리트비노프는 비열하지 않았다. 약혼녀인 타티야나에게 진실한 모습으로 사죄한다. 그러나 이리나는 리트비노프의 곁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을 말하지만 머물지 않는다. 사랑을 말하지만 머물지 않는 것은, 농노제를 철폐하지만 농노를 인간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사랑은 사치스럽고, 일상이 나약할 때 제일 먼저 포기되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나의 얄팍한 생각에 철퇴를 가한다. 서양의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의 자유주의 운동에서 내가 가장 감명받았던 역사적 지점은 사랑을 절대 변방에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적 혁명의 과정에서 사랑을 중요한 해법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리트비노프는 서구화되어 가던 러시아의 지식인을 대변하는 인물인듯했다. 그러나, 그의 길이 러시아가 나아갈 지점이라 제시하기에는 허술한 면이 많았다. 투르게네프는 “독자”를 직접 부르며 자신의 분신으로 리트비노프를 세우지 않았다. 무기력하고 염세적인 리트비노프를 비판하며 독자에게 더 많은 고민을 던졌다. 투르게네프가 바라던 세상은 무엇이었을지, 짐짓 더 궁금해진다.
리트비노프는 약혼녀 타티야나를 잃고, 첫사랑이던 이리나도 잃고 쇠약해진 아버지가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
새로운 것은 뿌리내리지 못했고, 낡은 것은 모든 힘을 잃었다. 무능한 사람과 비양심적인 사람이 충돌하곤 했다. 뿌리까지 뒤흔들린 생활양식은 마치 진펄처럼 끊임없이 흔들렸다. 오직 ‘자유’라는 위대한 말만이 마치 성령처럼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이반 투르게네프(이항재 옮김), <연기>, 문학과 지성사, p.264
리트비노프는 참회한다. 다시, 타티야나를 찾는다. 이리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리나가 몰락해가던 제정 러시아의 모습인 것만 같다. 작가는 “악의에 찼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매혹적이고 그녀를 따르는 남자는 여전히 많았지만, 그 누구도 곁에 두지 않고 그 누구의 곁에 머물지도 않으며 “악의에 찬 모습으로 길을 잃은 영혼의 주인”이라 표현했다. 리트비노프처럼 서구화된 지식인인 포투긴은, 이리나에게 끌려다녔던 또 다른 남자인 포투긴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질문은 제정 러시아의 역사로 뒤돌아 보아야 한다. 구부러진 세상에 직선을 그을 수 없다던, 보부아르의 소설 <레 망다랭>의 문장이 생각난다. 도덕도 규범도 예의도, 그 사회의 잣대를 벗어나기 어렵다. 사랑도, 열정도, 그 사회를 벗어나기 어렵다. 혼란한 사회에서는 혼란한 형태로, 더 혼탁한 형태로,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방법이어도, 그런 방식으로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디엔가 말하지 못하는 사랑이 많다면, 말하지 못할 만큼 참혹한 세상일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