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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Nov 21. 2024

사랑, 혼란(2)-그래도 변하지 않는 가치

이반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자식>


<연기>를 읽은 후,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하나 더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년에 사 두었던 민음사판 세계문학 전집 404번 <아버지와 자식>을 책장에서 다시 뽑았다. 사실주의적 소설은 사건의 전개에만, 그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에 탁월하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내 관점을 뒤돌아보게 했다. 역시나 많이 읽어야 한다. 읽을수록 보이는 것은 많아지고 더불어 나의 감각이 얼마나 무딘 칼날 같았는지 느껴지는 순간이 왔다. 그의 단어와 문장을 읽으며, 내 감정의 칼끝을 벼린다. 


작가 투르게네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고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시대를 관통하는 용어들이 속속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내가 러시아 당대의 역사를 모두 몰라서 문제이지, 그때의 러시아인들은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지식인이었을 테니, 이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글이라고 읽힐 만도 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까지도 러시아의 문맹률은 80-90%에 달한다고 알고 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사람들이 얼마 없는 곳에서도 묵묵히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하고, 글을 써간다는 것이, 읽을 사람도 없는 광막한 러시아에서, 글을 이 정도의 수준으로까지 써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적어도 모두가 책을 읽을 줄 알고, 하루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책이 출판되는 과잉의 시대에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또 하나, 아무리 시대에 대한 고민이 짙더라도 이 내용을 문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눈앞에 환하게 그려지도록 펼쳐진 묘사는 그 어떤 형용 어가 없어도 담백한 그림으로 펼쳐진다. 인간의 생활은 미사여구가 아니지. 단단한 명사와 가차 없는 동사로만 이루어지지. 그럼에도 사랑을 말하고, 그럼에도 쓸데없는 행동을 일삼으며, 삶 안에서 후회와 고통을 반복해 가는 사람의 삶에 애정을 버리지 않는 이 인문적 서술 방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고작만 몇천 원이라 쓰여있는 책이라는 물건 앞에서 손을 모으거나 몇 개의 문장과 단어는 여러 번 읽거나 적거나 메모를 한다.


제목 원제를 그대로 직역하면 <아버지들과 아이들> 혹은 <아버지와 아들> 정도라고 하는데. 왜 직역을 하지 않고, <아버지와 자식>이라고 했을까. 다 읽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그 뜻이 이해가 되었다. 투르게네프는 실제로 1840년대에 태어난 아버지 세대와 1860년대에 태어난 아들 세대의 갈등을 그리고자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그 대결(!)의 의미로 그렇게 제목을 의역했을까 상상하게 된다. 1840년대는 프랑스를 시작으로 자유주의 혁명이 있었던 시기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열기가 아직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그 연장선상에서, 부르주아들을 위한 혁명은 점차 대중에게 온기를 길고 긴 시간 동안 온기를 퍼트리고 있었다. 그 자유의 피바람을 낭만으로 여기던 시대가 지나고 1860년대가 오면 싱싱한 에너지의 평범한 사람들, 그들의 노동과 사회적 기여에 대해 더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늘어난다. 


아버지 세대에게 대학생이 된 아들이 아버지에게는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불편한 젊음으로 읽혔던 것일까.

‘자존심을 전부 내려놓고 생각해 봐도 그들은 우리보다 진실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에게는 우리가 갖지 못한 무언가가, 우리보다 우월한 무언가가 있는 게 느껴져...... 젊음인가? 아냐, 젊음만은 아니야. 귀족 기질의 흔적이 우리보다 적다는 게 바로 그 우월함 아닐까?’

이반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자식>, 민음사, p.102-103


다음 세대에 대한 어른들의 못마땅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세대 간의 대결과 갈등을 보다 심도 있게 해부하고 있다. 그리고 투르게네프는 어느 인물도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인간의 본능적 모순 때문에 그 어떤 사상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서술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특히나, 세상이 아무리 달라지고 바뀌어도 바뀔 수 없는 가치는 계속 변주되는 단 하나의 가치이다. “사랑”. 그 젊은 ‘자식’들이 아무리 변명하고 거부해도, 결코 사랑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낭만주의 시대를 풍미했던 아버지 세대는 ‘바이런’을 읽었던 ‘귀족적’ 가치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아르카지와 바자로프는 달라진 세상에서 스스로를 니힐리스트라고 부르며 모든 가치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를 바라는 태도를 지녔다. 또한 과학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에 대해 보다 많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에게 아버지가 읽는 ‘바이런’의 시는 감정의 과잉이며 거추장스러운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 같은 일상의 과잉이었다. 인간이 누려야 할 것들은 실제적인 것들, 즉 자연과학과 의학 정도일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배격했다. 


모든 청년들은 그렇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제외하고는 모두 배격한다. 아는 것이 적기 때문에 가능한 판단이고, 겪어 본 것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용기이며, 누려본 세상이 작아서 사회에 대한 해석도 간단하다. 피아의 구별이 확실하고 꾸물대지 않는다.(그래서 나는 청년들이 순수하고, 그 순수함으로 세상은 보다 나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고 믿는다.)


청년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투명한 유리구슬 안의 세상에서 술잔을 부딪힐 때는 모든 것이 견고한 듯 보였지만, 마차를 타고 도착한 다른 마을에서 맞이한 공기는 그들의 투명한 유리구슬이 균열을 일으킨다.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 놓쳐버린 시간과 후회의 감정. 예기치 않은 사고 같은 입맞춤. 말도 안 되는 실수로 인한 감염.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딜까. 


투르게네프는 삼각 플라스크와 현미경이 올려진 하얀 테이블 위에 두 청년을 해부하듯 올려두고 변수를 하나씩 첨가한다. 그들의 가치관을 흔들려는 아버지가 등장한다면. 그들에게 어떤 사랑의 감정이 꿈틀댄다면. 그들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작가는 실험을 하고 관찰일지를 쓰듯 이야기를 매섭게 이어간다.


상수마저도 변질될 수 있을 실험대 위에서 두 청년은 그대로 무너진다. 아니, 재조합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을 재구성하려 발버둥 치는 두 청년을 가여운 눈으로 바라본다. 사랑임을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의 신념이 자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배워 드디어 그 청년은 ‘용기’라는 단어를 재정의 한다. 작가는 묵묵히 모습을 바라본다. 바자로프는 신봉하는 가치 덕분에, 죽음을 맞이한다. ‘니힐리스트’라고 불리고자 했던 그가 스스로 ‘니힐(라틴어로 “없음”이라는 뜻)’이 되어간다. 죽어가는 바자로프는 마지막 순간에야 지나간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조차도 사실은 자신이 비판하던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그는 마지막에 스스로를 알아채고, 그리하여 스스로를 구원했다.



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 사실은 예전에도 무의미했는데, 하물며 지금이야 더욱 그렇죠. 사랑은 형태입니다. 하지만 나 자신의 형태는 이미 붕괴되고 있어요. 차라리 이렇게 말하죠. 당신은 참으로 멋집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서 있으니 참으로 아름다워요.......

러시아에는 내가 필요해요...... 아니,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그럼 누가 필요하죠? 제화공이 필요하고, 재봉사도 필요하고, 푸줏간도...... 고기는 푸줏간이 팔고.....

이반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자식>, 민음사, p.343, 344


사랑에 굴복한(!) 아르카지는 그렇게 기성세대가 되어갈 것이다. 바자로프는 마지막 숨을 쉬고 일생에 단 한 번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뒤늦게 잡으며, 자신의 지난 신념들에 걸려 넘어졌던 순간들을 토로한다. 그는 영원히 청년으로만 살아있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수정하고 변절할 시간을 허락지 않을 것이다. 변절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가혹하다. 청년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이 실험대에서 실험을 겪어볼 시간, 그들이 스스로 결과를 도출할 시간, 그리고 그들이 수정하여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시간. 


세상이 혼란할수록, 현혹하는 것들이 많을수록, 내가 실험대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본다. 발가벗겨질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나에게는 얼마의 시간이 남았을까.






덧) 번역가 연진희는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여러 상황과, 러시아 내부에서만 쓰던 고유 용어를 어떤 부분에선 부러 직역하여 조금 더 러시아의 문화 자체를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으로 수많은 각주를 달아가며 정성을 들였다. 단순히 우리의 정서로 의역해도 되었을 것을 그렇게 하지 않고, 조금 더 러시아 자체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자체를 소개해 주어 도리어 많은 공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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