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의 소설은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로 완전히 구별 짓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읽고 난 뒤의 나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그 뒤에 오는 나를 온전히 인정하고 만날 수 있을까. 소설의 내용이 어렵다가도, 내용의 깊이에 압도되다가도, 책의 끝 장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 자신과 부끄럼 없이 만나야만 하는 시간이 어렵다. 모든 독서가 대체로 나를 다시 만나게 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고, 반추하는 시간을 요구하지만. 한강은 조금 더 강하고 진하다. 책의 평론에 신형철은, “누구나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작가들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한강은 매번 사력을 다하고 있다.”라고 썼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책은 사력으로 읽어야 한다는 뜻도 될 것 같다. 예전에 <채식주의자>를 읽고 난 뒤, 나는 힘이 빠지고 손목이 꺾여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몸을 침대에 뉘어야 했다. 책을 읽고 난 뒤의 나의 모습을 나는 어제의 일처럼 또렷이 기억한다.
제주 4.3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읽기 시작했지만 몰랐어도 상관없을 이야기였다. 세상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그렇지만 있지 않길 바라는, 그런 고통에 대한 이야기. 작가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나는 그 표현을 들으며 사랑의 무게감을 생각한다. 사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날리는 눈만큼이나 수많은 사랑이 세상에 뿌려져 있으리라 상상해 본다. 절대 작별할 수 없었던 수많은 순간들은 모두 사랑이리라 희망을 놓아본다.
나는 내가 어떤 대상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그 모든 순간들에만 순도 높은 오롯한 사랑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누군가를 바라는 마음과 원하는 마음,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모두 사랑 아닌 것은 아니지만 다른 말로 치환해도 어떤 경우에는 통용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말로 치환되지 않는 사랑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대상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순간, 그 자체만이 사랑의 결정체일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그 사랑의 결정체는 어떤 모양일까.
나는 이 책을 읽고 작가 한강이 깊게 파 들어간 소재인 "눈"의 모양일 것이라 확신했다. 서로 엉키고 뭉쳐져서 결정을 만들고, 날리는 모습은 그대로 너무 아름답지만, 그 사이에 한 생명이 살고 죽을 수도 있는. 날리는 눈은 무게감과 속도감이 희미하지만 모든 풍경과 소리마저 잡아 삼키는 무서울 정도로 흰. 그런 눈 말이다. 나는 그 눈이 상하좌우로 나리고 푹푹 쌓이면서 누군가의 잘못과 누군가의 고통이, 그 공간과 삼켜진 시간 속에 사라지는 상상을 했다. 그 순간만이 사랑의 모양일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소리를 잡아 삼키는 눈 속에서 대화하기 위한 언어가 제주 방언이라 생각하니 사랑의 언어는 눈부셨다. 시대는 개인의 삶을 좌우하는 일이 잦고,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홀로코스트에 인생의 한 면을 내어 주며 살아간다. 폭력으로 잊힌 것들을 기록할 수 있다면, 그 기억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 밖에서 살지는 않는다고 확신한다. 이 책은 그래서 모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위로이자 헌사이다.
이 책은 이미 혼자만의 학살을 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희미하게 시작했다. 경하의 삶은 이미 끝나 보였다. 그러나 무언가를 잊지 않으려는 단호함, 잊지 않는 것을 넘어 "작별"을 고하지 않는다는 결연함은 그녀가 끝없이 지웠다 쓰는 유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끝없는 유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 그 어디쯤 같았다.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천국에 가기 전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살아있는 동안 죄를 씻기 위해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이 떠오르기도 했다.
소리가 사라지면 고요함이 증폭되는 폭설 속에서 흰 눈을 굴리며 눈 속의 실체에 대해 모른척하고 싶었던 어느 겨울의 나는 제주를 여행했다. 그리고 그때 한쪽으로 치워진 눈이 쌓인 중산간 도로 한가운데에서 차를 피하지 않는 고라니를 만났다. 고라니와 한참을 서로 쳐다보다 차가 멈출 수 있었던 외길은 '제주 4.3 공원'이었다. 그곳에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시종일관 그 사진을 이미지로 떠올렸다.
겨울, 질퍽한 눈, 흐림, 나무 위 까마귀, 이름자만 빼곡히 채워진 무덤, 차 한 대 지나지 않던 중산간 도로.
아직도 제주는 그 시간에서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작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름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떠날 수 없고 떠나보내지 않는다. 모두가 기억해야, 떠나보낼 수 있다. 모두가 인정해야, 작별할 수 있다.
한 사람이 한 가지 사건으로 생을 마무리하지 않듯 소설의 진행은 여러 겹으로 진행되었고, 나는 추도문을 읽는 마음으로 소설을 읽었다.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도 제문 같았는데, 10년도 더 된 그때의 흑백영화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지슬>을 넘어섰다고 보는 이유는 제주를 통해 1950년대 전국적인 보도연맹 사건과 전쟁, 이념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함께 다루었다는 점이었다. 제주는 제주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와 연대해야 함을 알게 하는 합리적인 설득이었다. 시가 가지는 서정성과 산문이 가지는 논리성,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소설이라 생각했다.
더 이상 살지 않길 바라듯, 하루하루 목숨의 줄을 끊어가고 있던 경하에게 '새'를 구해달라는 친구 인선의 전화는, 하루하루 목숨의 줄을 이어가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죽음보다도 생경하고 생생한 고통의 삶을, 이어 달라는 부탁을 경하는 거절할 수가 없다. 죽음보다 고통에 인간은 더 큰 연민이 있을까. 이끌리듯 ‘인선’의 ‘새’를 구하러 눈보라를 뚫고 찾아간 제주 중산간의 어느 마을에 들어서는 과정, 그리고 죽은 새와 ‘인선’의 환영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 등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으로 독자를 몰아간다. 현실이 무엇이고, 사실관계가 무엇인지를 찾아가다 그 자체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이, 고통에 둘러싸인 대체로의 인간에게 중요한가.
인선과 인선의 어머니가 평생에 걸쳐 헤맨 시간은, 차라리 꿈이길 바라지 않을까. 차라리 죽은 사람들이 연옥에 갇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했던 행동이 아닐까. 차라리 꿈이었으면, 인선의 잘려나간 손가락의 감각을 살리기 위해 3분마다 바늘로 찔러 상처를 덧입히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새의 비어있는 뼈마디와 작고 더 작은 심장과 위장에 며칠 물을 먹지 않아도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차라리 환영이었으면, 하는 일은 세상에 차고도 넘친다. 그런데 이 소설은 고통은 무한하고 희소한 시간에 잠시 웃는 인간에게 신이 아니라 다른 인간이 손을 내민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경하에게 인선이 내민 손길을, 경하는 잡는다. 인선은 신이 아니라 경하를 택했다.
경하는 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지경으로, 인선이 하려고 했던 영화 작업의 구상을 찬찬히 살핀다. 경하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사람처럼, 이 벽을 뚫지 않고 한 발도 나가지 못함을 직감한다. 작가 한강이 그랬다고 했다, 이 소설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써야 끝날 것 같았다고. 읽기에도 고통스러운 소설이, 쓰는 이가 어떤 심정으로 밀고 버텼을지 짐작되지 않는다, 다만 그 고통이 나는 3분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주삿바늘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고통스럽게 소설을 읽은 후에 드는 묵직함과 후련함, 함께 연대할 것이라는 다짐과 우리 모두 다르지 않으리라는 안도가 고통 안의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그렇게 단박에 우리를 사랑으로 돌려세운다. 그 고통의 길로, 사랑의 길로 성큼 다가설 수밖에 없도록. 경하가 인선에게 그랬듯.
오랜만에 정리할 수 없는 독후감을 쓰는 기분이다. 내가 하는 말을 나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너무 거대하고 생생한 문장과 비유는 모두 작가의 사유에서 나온 형용이었다. 그 비유는 너무 생생하고 깊고 아파서, 나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이 소설에 던져 읽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얄팍하게 안온하며 한강의 사유를 또 한 번 읽어보았다 자평하고 있다.
덧> 다시 읽어보고 싶어 붙인 띠지는 한두 군데가 아니고, 그야말로 덕지덕지. 모든 문장은 훔쳐 오고 싶을 정도. 몇 문장을 옮겨 적어볼까 하다가, 너무 많아 포기한다.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는 정성과 노력을 너무 날름 받아넘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