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내 기준에서 독특한 글쓰기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작가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였다. 낮은 감도의 필름을 감아 찍는 사진기에 찍힌 점들이 촘촘히 박힌 듯한 글들에서, 사건의 전개가 마치 해체적인 추상화를 그린 피카소를 떠올리게 했다. 읽히지도 않는 글은 몸으로 흡수되길 기다리는 활자 같았고, 내 몸 세포의 크기보다 활자의 크기가 더 컸는지 처음에는 글이라고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다. 지금도 뒤라스는 읽을 때마다 다른 감상으로, 다른 부위로 내게 흡수되려 노력한다.
욘 포세의 글을 읽으면서는 더 충격이었다. 이건 다른 의미로 강렬했는데, 두껍지 않은 양장본을 쉽게 본 내 잘못이겠다. 모든 글은 그림 같았다. 모든 묘사는 다 떼어놓아도 하나의 의미를 가졌다. 시는 아니다. 시와는 다르다. 나는 이런 글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모든 묘사는 다 떼어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붙여 놓았을 때는 아름다움 그 이상이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작곡할 때 썼던 대위법(對位法) 같은 느낌이랄까. 오른손과 왼손은 모두 각각의 멜로디를 연주하지만, 그래서 오른손, 왼손 그 자체로도 완벽한 하나의 곡이지만, 둘이 합쳐졌을 때는 더없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느낌 말이다. 그래서 포세의 글은 스토리를 따라가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성된 하나의 그림에서 오는 안정감, 안온함, 그런 것들이 내 곁에 오랫동안 머물러주었다.
4년 전에 욘 포세의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가 떠올랐다. 바흐의 피아노곡 인벤션과 신포니아를 계속 반복해서 듣는 것과 같은. 아니 모리스 라벨의 음악 “볼레로”도 생각했다. 같은 구절이 계속해서 반복되며 조금씩 일어나는 변주 안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을 찾아내고, 그 작은 움직임 다음에 오는 그 작은 차이들을 발견하며 조금씩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그런 시간의 경험 말이다.
소설은 아침과 저녁, 그리고 다음날 아침과 저녁이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이 삶과 죽음을 순차적으로, 그리고 순환적으로 보여주려는 듯 보였다. 그 순환의 고리의 어느 선에 내가 서 있는 것이라면 나도 작가와 비슷한 마음으로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안온함이 밀려왔다. 생명의 탄생에 대해 그 자체로서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하고 무겁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내게도 선명한 스케치로 남겨놓을 수 있게 되었다.
작가의 고향인 노르웨이의 구불한 피오르의 바람과 바다의 모습이 보고 싶어 졌다. 피오르의 해안에서는 아마 어디에서도 끝이 느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바다가 펼쳐질 것이다. 광막하고 커다랗게 뻥 뚫린 대서양이나 태평양 같은 거대하고도 거센 파도가 있는 바다는 아닐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옷깃을 파고드는 찬 공기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해안의 곡선이 바다를 더 거대하게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두렵고 더 거대해 보일 때가 많다. 그 피오르 해안은 정말 그럴까,
어두운 바다 위로 울려 퍼지는 어떤 생명의 탄생을 “음악적 구조(救助)”로 표현하는 장면은 커다란 심포니(교향곡) 같았다. 거대한 교향곡 속에서도 악장과 악장 사이의 간극처럼 가느다란 침묵과 헛기침이 글 속에서 느껴졌다. 나는 이 소설만큼 마음의 침묵을 느끼며 문장을 읽었던 적이 있었나 돌아본다. 고요함과 조용함과는 다른, 어떤 생명의 탄생과 그 이후의 죽음에서 오는 무게감이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키려 짓누름이 느껴졌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을 더 강렬하게 표현하는 힘을 가졌다. 그렇지만 침묵을 글쓰기에서 보여주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욘 포세는 그 간격과 침묵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글을 썼고, 나는 침묵이 음악의 일부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편견을 깰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