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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선 Oct 31. 2024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원하는 것을 원하는 삶.

시몬 드 보부아르, <레 망다랭 1, 2>

견딜 수 없다면,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 정도의 마음이 될 수 없다면, 나는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그렇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여 그 마음을 당신이 이용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언젠가의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택하기도 했지만, 떠날 때는 가차 없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에 관하여 알아보고 그의 에세이를 읽은 것은 어쩌면 실존주의라는 단어를 알게 된 단순한 시작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2차 세계대전 전후(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초반)의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방황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 <레 망다랭(Les Mandarins)>을 읽고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생각과 감성을 동시에 얻은 책을 읽은 후라 그럴까. 마음은 후련했고 생각은 많아졌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세계에 다른 발걸음을 옮긴 기분이었다. 전쟁 후 지식인들이 이념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가운데에(이토록 정치적인 소설에서)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사랑에 관해(이토록 진한 로맨스라니) 자연스럽게 써내려 간 필력에 감탄했다. 보부아르는 실존주의 철학의 사상가이기도 하지만 진실하고도 내밀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으로 프랑스의 문학상인 공쿠르상(Le Prix De Goncourt)을 수상했다고 하니 철학자이기도 하지만 완벽한 작가임에 분명하다.(대단하고 멋진!)


일제에게 해방 이후 우리나라 지식인들도 소위 좌우의 틈바구니에서 중도 조선을 걸었던 이상주의자들은 모두 제거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을 상기하면, 프랑스 역시도 크게 다를 수 없었음이 새삼스러웠다. 또한 지식인이 짊어지는 삶의 무게와 한계, 그리고 때로 쉽게 행동하지 못하는 나약함에 제법 큰 한숨이 나왔다. 전후 상황에서 강력한 '제국'으로서 재건(再建)되길 바라는 욕심도 있겠지만, 제국주의(Imperialism)라는 속성이 갖는 반지성(反知性)을 지식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프랑스 국민’으로서 송두리째 거부하고 비판할 수 있었을까. 강력한 국가 중심의 통제를 주장하는 우파 중심의 '드골 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프랑스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마셜플랜)에 대한 우려, 스탈린주의의 소련이 보여주는 폭력적인 공산주의를 그대로 수용하기에도 지식인들은 괴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이데올로기가 없다는 것은, 완벽한 인간이 없기 때문일 거다. 여하튼, 거칠게 이야기하면 그들이 생각했을 프랑스의 재건은 사회주의적 체제로 유럽이 갖고 있었던 문화적 토대와 민족적 개성 위에 자유로운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릴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국가의 모습을 이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프랑스도 독일의 파쇼에 맞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리고 인민에 의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당시 지식인의 숙명과도 같은 과제였을 것이다.


적(敵)이 분명한 전시(戰時) 상황이나 식민지 상황에서 개인의 시대적 인식이란 그리 어렵지 않다. 피아(彼我)의 구별이 쉽기 때문에 판단은 분명하고 해야 할 일도 뚜렷하다. 적이 분명하다면 싸우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끝나고 새로 일으켜야 할 '재건의 시대'가 되었을 때는 진정한 카오스 상태가 된다.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재건해야 할 지에 대한 투쟁은 전방위로 일어나기에 그 안에서 중심을 잡고 걷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헝클어진 상황을 어떤 개인의 노력으로 풀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자각마저 든다면 지식인을 허무와 좌절의 고통으로 밀어 넣는다. 거기에다 세상은 양극단의 이념 중 하나만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현실이었다. 대부분의 좌파 지식인들은 아예 입을 닫거나 운신의 폭이 크지 않았다. 그리고 재건의 시대가 아니더라도, 전시 상황만큼 단순하지 않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이 문제는 같은 무게로 남아있다.



나는 사랑 아니면, 한 순간도 함께 걷지 않으려 했다.

이념과 현실을 이야기하듯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를 어떻게 우리는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욕망의 키스는 사랑의 키스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2권, P.492)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허락되어 있는지.

나는 저 문장에서 우리가 사랑을 구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지, 때로 그것을 구별하는 일이 소용이 있는지에 대해서 묻고 싶어질 정도였다.


"어떤 진실이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확신한다 해도, 그 진실을 말할 겁니까?"(1권, p.263)

"난 누구도 진실을 독점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아요. 아마 정치인에게는 더 복잡한 문제겠죠. 그러나 난 대중을 조종하려는 사람들의 편이 아니라, 조종당하는 사람들과 같은 편이에요. 그들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정보를 제공해 주기를 기대합니다."(1권, p.264)

소설 속 주인공인 앙리는 신문사 "레스푸아"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그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는 완벽한 이념이 아니라고, 공산주의도 비판받아야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내가 공산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고. 나는 다만 어떤 신념과 이상을 지속적으로 신앙처럼 따르지 않으려는 것뿐이라고. 그 대답을 하는 앙리는 자신의 여자 친구 폴에 대해 '그녀에게서 내 마음은 떠났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사랑은 종말을 고했다고 말하며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신의 '노선'을 정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이라 믿었다.


"개인의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지."
"구부러진 공간에 직선을 그릴 수는 없네."(2권, p.405)

또 다른 주인공 뒤브뢰유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개인은 어떤 순간에 자신의 '위치'를 정할 수밖에 없다는 말로 대신한다. 그 위치란,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물이 아니라 세상 위에 만들어져 있는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그 선택지가 많지 않을 때 자신의 위치를 구겨 넣기란 얼마나 괴로운가 말이다. 때로 존재의 이유마저 위협받는다. 그토록 오래 기다려온 사랑을 껴안으면서도 '지금 나는,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 사랑할 자격은 있는 사람인가?'라는 고민을 털어놓는 괴로움과 같다. 그렇지만 같은 이유로 인해 뒤브뢰유는 "개인적인 구원이란 불가능해."(2권, p.406)라고 이야기한다.


개인의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개인의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사회 안에 몸 담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어디까지가 개인인가, 어디까지가 사랑인가 말이다. 냉전 시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같은 문제를 언제나 안고 산다.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봐.'라는 고민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통용되며, 누군가에게 뜨겁게 키스하면서도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구별조차 못하는 순간도 허다하지 않은가 말이다. 심지어는 어디까지 허용해야만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은 어떤 이유로 다가오고 또 사라지는가. 왜 나는 이런 것들에 골몰하게 될까. 누군가에 대해 열렬한 마음을 품고 있어도 사랑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그 열렬한 마음은 거짓인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사랑은 늘 부당하다. 루이스는 타당한 이유도 없이 나를 사랑했다. 나는 그걸 놀라워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 역시 놀랍지 않다.(2권, p.455)

이 사랑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 사랑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지.(2권, p.289)

나는 이 문장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도무지 사랑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 세상의 시간 위에서 내 위치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나는 도대체 나의 사랑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결국 실존의 문제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어떤 것에 대한 이유와 신념이 어떻게/왜 바뀌는 것을 밝히고 타당하다고 믿는 그 자체가 그리 중요할까 싶은 생각으로 흐르게 된다. 너무 무리한 생각일까. 물론 실존주의를 실천하며 살아가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여전히 나는 어디에 나를 두어야 할지 고민을 한다. 사실 이미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방향을 잡아 제법 오래 걸어버렸지만(나는 이미 실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길을(내 실존을) 의심한다. 그리고는, 분명하지 않다면 이 길을 걷는 것이 의미 없다고 핑계를 대며 그만둘 각오도 언제나 한다. 이념이 필요 없는 세상이지만 나는 언제나 나를 굽히는 일에 인색하다. 유연하기보다는 강인하고 단단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한순간도 '분명하지 않은' 사랑은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상대의 감정이 분명할 때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을 정확하게 깨닫게 된 순간에서야 시작했던 것들만을 사랑이라 불렀다. 그것들은 때로 신중한 모습이었겠지만 그래서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으로 개척하는 것에는 모두 실패했다. 그래 봐야 그 모든 사랑은 실패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나 나를 과감하게 던지지 못했다. 그래서 나의 실존은 희미했고, 나는 탈이념적으로 살고 싶었지만 누구보다 이념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인가, 아닌가를 지속적으로 나에게 묻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강요하며 이 시간들을 버텨왔으니 말이다.


견딜 수 없는 그 모든 순간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을 보내면서도 때로는 감정에 책임지는 것을 어떤 행위에 대한 책임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감정은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면서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서서히 진행되는 어떤 감정이 무엇이 될지에 대해 지켜보는 인내심은 가지지 못하고 단번에 알아보기만을 바랬으니, 이 얼마나 빈약한 시간들을 흘려보낸 건가 싶다. 스스로에게 헌신의 이름으로 의무를, 배려의 이름으로 구속을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어떤 분명하지 못한 순간에는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라 생각하며 과도한 죄책감마저 가졌던 듯싶다. 관계에서 죄책감은 끝을 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른 채 나는 완벽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지 않았으므로 다행이라 안도했다. 불확실한 미래는 확실한 현재의 고통보다 불행할 것이라는 어리석음을 언제나 나는 안고 살았다. 나는 늘 미래의 나를 의심하며 살아갔다.



이상주의자인 앙리를 설득하며 뒤브뢰유는 말한다.

"지지한다는 건 결국 선택에 지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도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절대적으로 완벽한 것을 발견하려고 집착하면,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무엇도 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2권, p.539)

소설 속 등장인물 중 가장 신념이 강했던 주인공 뒤브뢰유는 가장 실존적인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매우 주체적인 자세로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강인함으로 말이다. 사랑과 삶에 깊이 침잠하면 때로 죽음도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나 그 사실에 대해 그는 '죽음은 스스로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토록 삶에 깊이 집중하면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는 스스로의 삶에 실존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간다는 건 우리가 삶을 믿기로 선택했다는 증거라고. 게다가 살아가는 건 단지 계속해서 숨을 쉰다는 뜻만이 아니야. 누구도 무관심 속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거든. 당신만 해도 어떤 건 좋아하고 다른 건 싫어하잖아. 그래서 분노하거나 감탄하지. 그건 당신이 삶의 어떤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걸 의미해"(2권, p.80)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나는 사랑하는 방식이라 말하고 싶어 졌다. 좀 더 아름답고 강인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 우리 삶을 그나마 '개인적으로' 구원하는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사랑은 내가 서 있는 위치, 그 자리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단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믿고 싶다. 내가 지금 있는 곳,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이것들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과 공간. 이 모든 것들이 가장 실존적인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보부아르가 평생의 동반자였던 장 폴 샤르트르를 바라보며 그에 대해 느낀 사랑과 삶이 어떠했을지 주인공 뒤브뢰유에 대한 묘사로 은근히 상상해 본다. 아스라이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소설의 여운은 길었으며, 여러 번 두 권의 책을 뒤적였다, 그 대화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길 바라면서.

그(뒤브뢰유)는 나에게 삶이란 살아 있음 자체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그는 죽음을 완전히 무시했고, 따라서 그 모든 활동은 그저 여흥 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했으며, 원하는 것을 원했다.(1권,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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